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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죽는 순간의 상승

이 세상에는 요가행자라고 불리는 여러 종류의 초월주의자가 있고, 그 종류는 하타 요가행자(haṭha-yogīs), 갸나 요가행자(jñāna-yogīs), 댜나 요가행자(dhyāna-yogīs,) 그리고 박띠 요가행자(bhakti-yogīs)이다. 이 모든 요기는 영적 세계로 이동할 자격이 있다. 요가(yoga)는 ‘연결하다’라는 뜻이고 요가 체계는 우리를 초월적인 세계로 연결될 수 있게 함을 의미한다.  앞 장에서 언급했듯이 원래 우리는 절대신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현재 물질적 영향으로 오염되었다. 따라서 영적 세계로 돌아가야 하고 돌아가게 하는 이 연결 과정을 요가라고 한다. 요가의 다른 의미는 ‘플러스’, 즉 ‘더하기’라는 뜻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절대신을 빼고 있다. 끄리쉬나 혹은 절대신을 우리 삶에 더할 때 인간 형태의 삶은 완벽해진다.

죽음의 순간, 이 완성의 과정을 끝내야만 한다. 인생을 사는 동안 완성에 다가가는 방법을 실천하면 죽음의 순간, 이 육신을 버려야 할 때 그 완성을 실현할 수 있다.

쁘라야나-깔레 마나사짤레나 prayāṇa-kāle manasācalena
박땨 육또 요가-발레나 짜이바 bhaktyā yukto yoga-balena caiva
브루보르 마뎨 쁘라남 아베샤 삼약 bhruvor madhye prāṇam āveśya samyak
사 땀 빠람 뿌루샴 우빠이띠 디뱜 sa taṁ paraṁ puruṣam upaiti divyam

“생명의 기를 미간에 집중하고 요가의 힘으로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여 완전한 봉헌으로 지고한 주를 기억하는 데 전념하는 자는 반드시 죄고인격신에 이를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 8.10》

학생이 4, 5년간 전공 공부를 하여 시험을 치른 후 학위를 받는 것처럼 삶이라는 과목을 인생 전반에  걸쳐 실행하고 죽음의 순간 그 시험에 통과하면 영적 세계에 이를 수 있다. 인생은 죽음의 순간에 시험받게 된다.

얌 얌 바삐 스마란 바밤 yaṁ yaṁ vāpi smaran bhāvaṁ
땨자띠 안떼 깔레바람 tyajaty ante kalevaram
땀 땀 에바이띠 까운떼야 taṁ tam evaiti kaunteya
사다 딷-바바-바비따하 sadā tad-bhāva-bhāvitaḥ

“현생의 몸을 버리는 순간에 기억하는 어떠한 것이든 다음 생에 틀림없이 얻게 될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 8.6》

완성을 위해 한 어떤 행위든 죽음의 순간에 시험받을 것이다.” 라는 벵골 속담이 있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끄리쉬나는 육신을 버릴 때 무엇을 해야 할지 설명하신다. 댜나 요가행자(명상가)들에게 스리 끄리쉬나가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다.

얃 악샤람 베다-비도 바단띠 yad akṣaraṁ veda-vido vadanti
비샨띠 얃 야따요 비따-라가하 viśanti yad yatayo vīta-rāgāḥ
얃 잇찬또 브라흐마짜리암 짜란띠 yad icchanto brahmacaryaṁ caranti
땃 떼 빠담 상그라헤나 쁘라박셰 tat te padaṁ saṅgraheṇa pravakṣye

사르바-드바라니 삼얌야 sarva-dvārāṇi saṁyamya
마노 흐리디 니루댜 짜 mano hṛdi nirudhya ca
무르드냐댜뜨마나 쁘라남 mūrdhny ādhāyātmanaḥ prāṇam
아스티또 요가-다라남 āsthito yoga-dhāraṇām

“베다에 능통하고, 옴까라를 발성하고, 버리는 삶의 질서에 있는 위대한 성자들은 브라흐만 안에 들어가느니라. 사람들은 그러한 완성을 희망하며 독신 수행을 한다. 이제 내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 과정을 네게 간략히 설명해 줄 것이다. 요가의 경지란 모든 감각적 활동에서 초연한 상태이다. 모든 감각의 문을 닫고, 마음을 가슴에 집중하며 생명의 기를 머리 꼭대기에 두는 것이 요가 안에 자기를 확립하는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 8.11~12》

요가 과정 중 이것을 쁘라땨하라(pratyāhāra)라고 하며 이는 “정반대로”라는 의미이다. 사는 동안 눈이 비록 세속적 아름다움을 보는 데 전념했다 하더라도 죽음의 순간에는 대상을 향한 감각을 원위치로 돌려 내면의 아름다움을 봐야 한다. 마찬가지로 귀가 세상의 다양한 소리에 익숙하더라도 죽음의 순간에는 자기 안에서 초월적인 옴까라를 들어야 한다.

옴 이뗴깍샤람 브라흐마 oṁ ity ekākṣaraṁ brahma
뱌하란 맘 아누스마란 vyāharan mām anusmaran
야 쁘라야띠 땨잔 데함 yaḥ prayāti tyajan dehaṁ
사 야띠 빠라맘 가띰 sa yāti paramāṁ gatim

“이 요가 수행을 한 후 신성한 음절 옴(om), 곧 문자 가운데 최상의 결합을 소리 내며 최고인격신을 생각하며 육신을 떠나면 반드시 영계(靈界)에 이를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 8.13》

이런 식으로 모든 감각은 외적 행위를 멈추고 비쉬누-무르띠(viṣṇu-mūrti), 즉 절대신의 형상에 집중해야 한다. 마음이 몹시 동요하겠지만 가슴 속에 있는 절대신을 향해 집중해야 한다. 마음이 가슴에 집중하고 생기가 정수리로 옮겨가면 요가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

이 시점에 요기는 어디로 갈지 결정한다. 물질계에는 수없이 많은 행성이 있고 이 우주를 넘어선 곳에 영적 세계가 있다. 요가행자들은 베다 문헌을 통해 이 영계에 대한 지식을 습득했다. 미국에 가려는 사람이 미국 관련 서적들을 보며 미리 어느 정도의 정보를 얻는 것처럼 베다 문헌을 읽음으로써 영계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 요가행자들은 이 모든 정보를 알고 있고 우주선의 도움 없이 자기가 원하는 어떤 행성으로든 이동할 수 있다. 어떤 기계적 수단을 통한 우주여행은 다른 행성으로 상승하는 공인된 과정이 아니다. 어쩌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엄청난 노력과 돈으로 기계적 수단을 이용해 몇몇 사람들이 다른 행성에 도달할지도 모르나 이 방법은 몹시 성가지고 비현실적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기계적인 수단을 이용해 물질계를 초월할 수는 없다.

더 높은 행성에 도달하는 방법으로 널리 인정되는 것 중의 하나가 갸나 요가, 즉 명상적 요가 수행이다. 하지만 박띠 요가는 어떤 물질적인 행성에 도달하는 것도 목표로 삼지 않는다. 끄리쉬나, 곧 절대신의 종들은 물질적 하늘에 있는 어떤 종류의 행성이든 출생과 늙음, 질병, 그리고 죽음의 네 원칙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런 행성들에 관심이 없다. 이 지구보다 더 높은 차원의 행성에서는 수명이 좀 더 길지만 그곳에도 여전히 죽음이 존재한다. ‘물질계’라 함은 생로병사가 있는 곳을 의미하고 ‘영계’라 함은 생로병사를 겪지 않는 곳을 의미한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물질계 내에 있는 어떤 행성으로도 올라가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기계적 수단을 통해 더 높은 행성에 들어가려 한다면 몸이 대기권의 급격한 변화를 감당하지 못해 순식간에 죽고 만다. 그러나 요가를 통해 더 높은 행성에 가려 한다면 그곳에 적합한 몸을 얻게 될 것이다. 이 지구 상에서도 인간은 바다나 수생환경에서 살 수 없고 수생동물 또한 지상에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 지구 상에서조차 그 환경에 적합한 몸을 가져야 하고, 따라서 다른 행성에서 살려면 거기에 적합한 특정한 몸을 가져야만 한다. 지구의 6개월이 더 높은 행성에서의 하루와 같으므로 그런 행성의 생명체들은 지구의 육신들보다 더 오래 산다. 그러므로 베다는 더 높은 행성에서는 지구의 시간으로 만 년 이상을 살 수 있다고 기술한다. 그러나 수명이 아무리 길다고 해도 죽음은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 2만 년 혹은 5만 년, 심지어 백만 년을 더 산다고 해도 물질계에는 그런 햇수를 모두 헤아릴 수 있고 결국 죽음의 순간이 온다. 어떻게 이런 죽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것이 바가바드 기따가 주는 교훈이다.

나 자야떼 므리야떼 바 까다찐 na jāyate mriyate vā kadācin
나얌 부뜨바 바비따 바 나 부야하 nāyaṁ bhūtvā bhavitā vā na bhūyaḥ
아조 니땨하 샤스바또 '얌 뿌라노 ajo nityaḥ śāśvato 'yaṁ purāṇo
나 한야떼 한야마네 샤리레 na hanyate hanyamāne śarīre

어느 때에도 영혼에게 생과 사란 존재하지 않는다. 영혼은 과거에 태어난 것이 아니며, 현재에 태어나는 것 또한 아니며, 미래에 태어나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 항상 존재하며 원초적이다. 육신이 살해될 때 영혼은 절대 살해되지 않는다.” 《바가바드 기따 2.20》

우리는 영원한 영혼이다. 그런데 왜 삶과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을 하는 자는 총명한 자이다. 끄리쉬나 의식을 가진 자들은 죽음이 존재하는 어떤 행성에도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으므로 아주 총명하다. 그들은 절대신과 같은 몸을 얻기 위해 더 긴 수명을 거절할 것이다. 이스바라 빠라마 끄리쉬나 삿-찟-아난다-비그라하(Īśvaraḥ paramaḥ kṛṣṇaḥ sac-cid-ānanda-vigrahaḥ,브라흐마 삼히따 5.1). 삿(sat)은 영원함을, 찟(cit) 은 완전한 지식, 그리고 아난다(ānanda)는 완전한 행복을 의미한다. 끄리쉬나는 모든 즐거움의 저장소이다. 만일 이 육신이 끝난 후  끄리쉬나의 행성인 끄리쉬나로까(Kṛṣṇaloka)나 다른 영계로 들어갈 수 있다면 삿-짓-아난다 같은 육신을 얻게 된다. 따라서 끄리쉬나 의식에 있는 사람들의 목표는 이 물질계 내에 존재하는 더 높은 행성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목표와 다르다.

개별 자아, 혹은 영혼은 미세한 영적 불꽃이다. 요가의 완성은 이 영적 불꽃을 정수리에 두는 것에 달려 있다. 이를 달성한 요기는 자기가 원하는 물질계의 어떤 행성에도 들어갈 수 있다. 여행자들이 뉴욕, 캐나다 또는 지구 상의 여러 다른 도시에 가는 것처럼 요기는 달이 궁금하면 달에 갈 수 있고, 그보다 더 높은 행성에 관심이 있으면 그곳으로 갈 수 있다. 지구 상의 어디를 가든 비슷한 비자와 출입국 심사가 있듯이 모든 물질적 행성에는 생로병사라는 원칙이 있다.

옴 이뗴깍샤람 브라흐마(Oṁ ity ekākṣaraṁ brama). 죽음의 순간에 요기는 초월적 소리의 간결체인 옴, 옴까라를 발성할 수 있다. 요기가 이 소리를 낼 수 있고 동시에 끄리쉬나 혹은 비쉬누(Viṣṇu)를 기억하면(맘 아누스마란: mām anusmaran) 가장 높은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이것이 비쉬누에 마음을 집중하는 요가 과정이다. 비인성주의자들은 절대신의 어떤 형상을 상상하지만 인성주의자들은 그런 상상을 하지 않는다. 그들은 실제로 절대신을 본다. 실제로 당신을 보든 상상하든 반드시 마음을 스리 끄리쉬나의 인격적 형상에 집중해야 한다.

아난야-쩨따 사따땀 ananya-cetāḥ satataṁ
요 맘 스마라띠 니땨샤하 yo māṁ smarati nityaśaḥ
따샤함 술라바 빠르타 tasyāhaṁ sulabhaḥ pārtha
니땨-육따샤 요기나하 nitya-yuktasya yoginaḥ

“벗어남 없이 항상 나를 기억하는 자에게 나는 쉽게 얻어진다.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그것은 그의 끊임없는 봉헌 때문이니라.” 《바가바드 기따 8.14》

적어도 바가바드 기따에 따르면 일시적인 삶과 즐거움에, 그리고 일시적인 편의에 만족하는 자는 총명하지 못한 자이다. 기따에 의하면 뇌가 아주 작은 자들이 일시적인 것에 흥미를 느낀다고 한다. 우리가 영원한 존재인데도 왜 일시적인 것에 관심을 둬야 하는가? 아무도 영원하지 않은 상황을 원치 않는다. 만일 집주인이 당장 방을 비우라고 한다면 처량하겠지만  더 나은 집으로 이사한다면 별로 슬프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본래 영원하므로 영원한 보금자리를 원한다. 또한 영원한 존재이므로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 늙고 병드는 것은 모두 표면적이고 영원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를 원치 않는다. 원래 우리는 고열을 앓지 말아야 하는 존재인데도 가끔 열병에 걸리게 되고 그러면 처방을 받아 조심스레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 네 겹의 고통도 고열과 같고 이 모든 것은 물질적 육신 때문에 생겨난다. 어떻게 해서든 이 물질적 육신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육신에 늘 따라다니는 고통을 피할 수 있다.

이 일시적 육신에서 벗어나도록 끄리쉬나는 비인성주의자들에게 음절 옴을 발성할 것을 권유하신다. 이런 식으로 영계로의 이주를 보장받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영계에 들어가더라도 그곳에 있는 어떤 행성에도 들어갈 수 없다. 브라흐마죠띠(brahma-jyotir) 외부에 남아있을 뿐이다. 브라흐마죠띠는 태양 광선에, 영적 행성들은 태양 자체에 비유할 수 있다. 영적 하늘에서 비인성주의자들은 브라흐마죠띠, 즉 절대신의 광채에 머물게 된다. 비인성주의자들은 브라흐마죠띠에서 영적 불꽃으로 자리 잡게 되고 이런 식으로 브라흐마죠띠는 영적 불꽃으로 꽉 차게 된다. 이것이 영적 존재에 합쳐진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들이 브라흐마죠띠와 하나가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각 영적 불꽃의 개별성이 유지되지만 비인성주의자들은 인격을 갖춘 형태로 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그 광채 속의 영적 불꽃으로 남는다. 태양광선이 무수한 원소입자로 이루어진 것처럼 브라흐마죠띠는 수많은 영적 불꽃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생명체로서 우리는 즐거움을 원한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존재(삿)와 더불어 더없는 행복(아난다)을 원한다. 완전한 상태에서의 생명체에게는 세 가지 본성이 있다. 영원함, 지식 그리고 더할 수 없는 행복이다. 비인성적으로 브라흐마죠띠에 들어간 자들은 브라흐만(Brahman)과 같은 완전한 지식을 얻은 채 그곳에서 어느 정도 머물지만 영원한 아난다, 즉 더할 수 없는 행복은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부분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빈방에 혼자 남아 몇 시간 책을 본다거나 생각에 잠겨 즐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몇 년, 틀림없이 평생을 그렇게 있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비인성적으로 최상의 존재 속에 합쳐졌다고 하더라도 결국 어떤 교류를 갈구하기 때문에 매 순간 물질계로 다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이것이 스리마드 바가바땀이 말하는 결론이다. 우주 비행사가 몇천 마일이나 여행할 수는 있겠지만 쉴 수 있는 행성을 찾지 못하면 결국 지구로 돌아와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휴식을 취할 필요가 있다. 비인성적인 형태로 휴식은 불안정하다. 그러므로 스리마드 바가바땀은 숱한 인내와 노력 끝에 영계에 들어가 비인성적 형상을 갖게 되더라도 사랑과 헌애(devotion)로 절대신을 섬기는 의무를 게을리하는 까닭에 비인성주의자들은 물질계로 다시 되돌아가게 된다고 한다. 우리가 이 지구 상에 있는 한 끄리쉬나를 사랑하고 섬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것을 배우면 영적 행성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영계에서의 비인성주의자들의 위치는 영구적이지 못하고 외롭기 때문에 어떤 관계를 만들려고 한다. 절대신과 개인적으로 교제하지 않는 탓에 그들은 세상으로 되돌아와 거기서 속박된 다른 생명체들과 교류한다.

그러므로 영원함과 완전한 지식, 더할 수 없는 행복을 원하는 우리의 본질적 특성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브라흐마죠띠에 혼자 오래 남겨지면 즐거움을 얻을 수 없으므로 물질계가 주는 즐거움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끄리쉬나 의식으로는 진정한 즐거움을 즐길 수 있다. 물질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성교를 가장 높은 쾌락으로 여긴다. 이것은 끄리쉬나와 함께하며 느끼는 즐거움, 영계에서의 성적 즐거움이 물질계에 그릇되게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영계에서의 성적 즐거움이 물질계에서의 성적 쾌감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다.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영계에 성생활이 없는 한 물질계에 반영될 리도 없다. 여기에서는 단지 그릇되게 반영되었지만 모든 즐거움의 저장소인 끄리쉬나 안에 진정한 삶이 있다. 그러므로 최고의 방법은 지금 우리 자신을 훈련해 죽음의 순간 영계인 끄리쉬나로까로 이동해 끄리쉬나와 교제하는 것이다. 브라흐마-삼히따(5.29)에 스리 끄리쉬나와 당신의 거처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친따마니 쁘라까라 사드마수 깔빠 브릭샤 cintāmaṇi-prakara-sadmasu kalpa-vṛkṣa-
락샤브레떼슈 수라비라비빨라얀땀 lakṣāvṛteṣu surabhīr abhipālayantam
락쉬미 사하스라 샤따 삼브라흐마 세뱌마남 lakṣmī-sahasra-śata-sambhrama-sevyamānaṁ
고빈다 아디 뿌루샴 땀 아함 바자미 govindam ādi-puruṣaṁ tam ahaṁ bhajāmi

“저는 원초적 주, 최초의 창시자, 소들을 돌보시며 모든 욕망을 성취해 주시는 고빈다(Govinda)를 숭배합니다. 당신은 영적 보석으로 지어졌고 수백 만의 소원 성취수에 둘러싸인 곳에 거처하시며 무수한 락쉬미(Lakṣmī) 또는 고삐(gopī)들에게서 크디큰 공경과 사랑의 섬김을 받습니다.”

이것이 끄리쉬나로까에 대한 설명이다. 그곳의 집들은 ‘시금석(touchstone)’이라 불리는 것들로 지어져 무엇이든 시금석에 닿으면 즉시 황금으로 변한다. 나무들은 소원 성취수 또는 ‘소망의 나무’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 이 물질계에서 망고는 망고나무에서, 사과는 사과나무에서 얻지만 끄리쉬나로까에서는 어떤 나무에서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소는 수라비(surabhi)라 불리고 끊임없는 양의 우유를 공급한다. 이것이 베다 문헌에서 찾을 수 있는 영적 행성들에 대한 설명이다,

이 물질계에서 우리는 출생과 죽음, 그리고 다른 모든 종류의 고통에 순응하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감각 만족 또는 파괴를 위한 수많은 편의 시설 및 도구를 발명했지만 늙음과 질병 그리고 죽음에 대한 어떤 해결책도 발견하지 못했다. 앞으로도 죽음과 늙음, 질병을 멈출 어떤 기계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죽음을 가속할 무언가를 만들 수는 있지만 죽음을 멈출 그 어떤 것도 만들어 낼 수 없다. 그러나 총명한 자는 물질적 삶에서 오는 네 겹의 고통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영계로 상승할 것에 신경 쓴다. 지속적인 황홀경에 있는 자(니땨 육따샤 요기나하)는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다. 그저 항상 황홀경에 빠져있을 뿐이다. 그의 마음은 벗어남 없이 끄리쉬나에 대한 생각으로 항상 가득 차 있다(아난냐-쩨따 사따땀). 사따땀은 ‘언제든 어디에서든’이라는 뜻이다.

인도에서는 나는 브린다반(Vrndavana)에 살았고 지금은 미국에 있지만 항상 끄리쉬나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물질적인 행선지와 상관없이 나는 늘 브린다반에 있고 브린다반을 떠났다고 할 수 없다. 끄리쉬나 의식이란 영적 행성 골로까 브린다반(Goloka Vṛndāvana)에서 끄리쉬나와 항상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하고 그런 의식에 있는 자들은 그저 물질적 육신을 버릴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스마라띠 니따샤하’란 ‘끊임없이 기억하는 것’을 의미하고 끊임없이 끄리쉬나를 기억하는 자에게 당신은 따샤함 술라바, 즉 쉽게 구해진다. 끄리쉬나 스스로 말씀하시기를 박띠 요가 과정으로 당신을 쉽게 얻을 수 있다고 하신다. 그런데 왜 다른 방도를 갈구해야 하는가? 하레 끄리쉬나, 하레 끄리쉬나, 끄리쉬나 끄리쉬나, 하레 하레/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만 하루 24시간 구송하면 된다. 다른 규칙과 규정도 없다. 길에서, 지하철에서 혹은 집에서나 사무실에서도 구송할 수 있다. 세금도, 다른 여분의 비용도 들지 않는다. 시작해보는 게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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