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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빠람빠라(Paramparā): 사제 전수를 통한 지식

스리 바가반 우바짜 śrī bhagavān uvāca
이맘 비바스바떼 요감 imaṁ vivasvate yogaṁ
쁘록따반 아함 아비아얌 proktavān aham avyayam
비바스반 마나베 쁘라하 vivasvān manave prāha
마누 릭쉬바까베’브라빗 manur ikṣvākave 'bravīt

“최고인격신, 주 스리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이 소멸하지 않는 요가의 과학에 관해 태양신 비바스반에게 가르쳤고, 비바스반은 인류의 선조인 마누에게, 마누는 익쉬바꾸에게 가르쳤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4.1》

아주 오래전 끄리쉬나는 신성한 바가바드 기따의 지식을 태양신 비바스반에게 전하셨다.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는 태양은 아주 뜨거운 곳이고 아무도 살 수 없는 곳이라 생각한다. 이 육신으로 태양에 아주 가까이 가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하지만 베다 문헌을 통해 태양은 지구 같은 하나의 행성이지만 모든 것이 불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지구가 주로 불과 물, 공기로 구성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이런 다양한 행성에 사는 생명체는 각 행성의 지배적인 원소들로 이루어진 몸을 받는다. 그러므로 태양에 사는 존재는 불로 이루어진 육신을 갖고 있다. 태양에 있는 모든 생명체 중 가장 높은 인격체는 비바스반(Vivasvān)이라고 하는 신이다. 그는 태양신(수리야-나라야나: sūrya-nārāyaṇa)이라고 알려졌다. 모든 행성에는 최고 인격체가 있고 이것은 미국에서 가장 높은 사람이 대통령인 것과 같은 이치다. 마하바라따(Mahābhārata)라고 하는 역사를 통해 이 행성(지구)에 오직 한 명의 왕 마하라자 바라따(Mahārāja Bharata)만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는 약 5,000년 전에 지구를 통치했고, 지구의 이름은 그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이후에 지구는 아주 많은 나라로 나뉘었다. 이렇게 우주 안에 있는 다양한 행성에는 보통 한 통치자가 있지만 가끔 여러 명의 통치자가 있기도 하다.

바가바드 기따의 제4장 첫 구절을 통해 아르주나에게 바가바드 기따의 가르침을 전수하고 계신 스리 끄리쉬나는 수백만 년 전 까르마 요가에 관한 지식을 태양신 비바스반에게 전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이 가르침은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 여러 다른 행성에 설파되었다는 것 또한 알 수 있다. 비바스반은 이 가르침을 그의 아들 마누(Manu)에게 반복했다. 이어 마누는 그의 제자 익쉬바꾸(Ikṣvāku)에게 그 지식을 전수했다. 마하라자 익쉬바꾸는 훌륭한 왕이었고, 지고의 신 라마짠드라(Rāmacandra)의 선조였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바가바드 기따를 배워서 혜택을 얻고자 한다면 이것을 이해하는 과정을 겪어야 하고, 그 과정이 여기에 묘사되어 있다.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처음으로 바가바드 기따를 설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베다 권위에 따르면, 끄리쉬나께서 이 신성한 가르침을 비바스반에게 약 4억 년 전에 전수하셨다고 추정된다. 마하바라따를 통해 바가바드 기따는 약 5천 년 전 아르주나에게 설해졌다고 알 수 있다. 아르주나 이전에도 이 가르침은 사제 전수를 통해 전해 내려져 왔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며 사라지게 되었다.

에밤 빠람빠라-쁘랍땀 evaṁ paramparā-prāptam
이맘 라자르샤요 비두후 imaṁ rājarṣayo viduḥ
사 깔레네하 마하따 sa kāleneha mahatā
요고 나쉬따 빠란따빠 yogo naṣṭaḥ parantapa

사 에바얌 마야 떼’댜 sa evāyaṁ mayā te 'dya
요가 쁘록따 뿌라따나하 yogaḥ proktaḥ purātanaḥ
박또’시 메 사카 쩨띠 bhakto 'si me sakhā ceti
라하샴 헤땃 웃따맘 rahasyaṁ hy etad uttamam

“따라서 이 지고의 과학은 사제전수의 계통을 통해 이어졌고, 거룩한 왕들은 그러한 방법으로 이해하였느니라.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계승이 끊어져 있는 그대로의 과학이 사라진 것처럼 되었다. 오늘 너에게 최고 존재와의 관계에 대한 이 고대의 과학을 말하는 이유는 네가 나의 친구이자 헌애자이므로 이 과학의 초월적 신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니라.” 《바가바드 기따 4.2~3》

바가바드 기따에 여러 요가 체계가 정확히 서술되어 있는데 이는 박띠 요가(bhakti-yoga), 까르마 요가(karma-yoga), 갸나 요가(jñāna-yoga), 하타 요가(haṭha-yoga)로, 이들 모두 요가라고 불린다. 요가란 단어의 의미는 ‘연결하다’라는 뜻이고, 요가를 통해 우리 의식을 절대자와 연결한다는 뜻이다. 절대자와의 재회 혹은 그와 우리 관계의 재정립을 의미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스리 끄리쉬나께 전수받은 이 요가는 사라졌다. 왜 그러한가?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말씀하시던 때에 학식 있는 성인들이 아예 없었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 당시에 많은 성인이 살고 있었다. “사라졌다”는 것은 바가바드 기따의 요지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학자들은 자기들의 종잡을 수 없는 관점으로 자기 나름의 바가바드 기따 분석과 해석을 하겠지만, 그것은 바가바드 기따가 아니다. 이점을 스리 끄리쉬나께서 강조하신 것이고, 바가바드 기따를 배우려는 자들은 이점에 주목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세속적 관점에서 아주 훌륭한 학자일지도 모르나, 그렇다고 바가바드 기따에 주석을 달수 있는 자질을 갖춘 것은 아니다.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제 전수의 원칙(빠람빠라)을 받아들여야 한다. 바가바드 기따를 단순히 학술적으로 접근할 것이 아니라 바가바드 기따의 정신을 파고들어야만 한다.

모든 사람 중에, 스리 끄리쉬나께서는 왜 하필 아르주나를 이 지식의 수령인으로 채택하셨는가? 아르주나는 훌륭한 학자도 아니었고 요가행자도 아니었으며 명상가나 성인도 아니었다. 그는 전쟁에 임하기 직전의 전사였다. 그 시대에도 위대한 성인들이 아주 많이 살고 있었고 스리 끄리쉬나께서는 바가바드 기따를 그들에게 주실 수도 있었다. 그에 대한 답은 아르주나가 비록 평범한 사람이었지만 한 가지 훌륭한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박또’시메 사카 쩨띠(bhakto 'si me sakhā ceti) “너는 나의 헌애자이고 나의 친구이다.” 이것이 아르주나가 가진 특별한 자질이고, 성인들조차도 가지지 못한 것이었다. 아르주나는 끄리쉬나가 최고 인격신이라는 사실을 알았고, 따라서 당신을 자기 영적 스승으로 받아들이며 항복했다. 스리 끄리쉬나의 헌애자가 아니면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할 수 없다.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하고 싶다면 다른 방법을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아르주나가 이해했듯이 반드시 바가바드 기따 자체가 규정하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만일 바가바드 기따를 다른 식으로 이해하고 싶거나 개인적 해석을 하고 싶다면 그것은 본인의 학문적 과시밖에 되지 않고 바가바드 기따가 아니다.

마하뜨마 간디가 자신의 비폭력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바가바드 기따를 해석했을 때처럼 학문적으로 바가바드 기따에 관한 어떤 이론을 만들어낼 수는 있다.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 어떻게 비폭력을 입증할 수 있나? 바가바드 기따의 주제 자체가 아르주나는 싸움을 주저하지만 끄리쉬나께서는 아르주나의 적을 모두 죽이라고 권유하시는 것인데도 말이다. 실제로 끄리쉬나께서는 아르주나에게 그 전쟁은 이미 절대자 당신께서 결정하신 것이므로 전장에 모인 사람들은 다시는 이 물질계에 돌아오지 않게 운명지어졌다고 말씀하신다. 전사들이 모두 죽게 될 운명은 끄리쉬나의 계획이었고, 끄리쉬나께서는 아르주나에게 그들을 정복하는 공적의 기회를 주신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싸움의 필요성을 선포하는데, 거기에서 어떻게 비폭력을 도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해석은 바가바드 기따를 왜곡하는 시도다. 개인적 동기에 의해 기따가 해석되자마자 그 목적은 사라진다. 베다 문헌의 결론을 우리 자신의 논리나 주장으로 얻을 수 없다. 우리가 지닌 논리력의 통제 안에 있지 않은 것은 무수히 많다. 경전을 예로 들면, 절대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묘사하는 다양한 경전을 찾아볼 수 있고 그것을 모두 분석하면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또한, 다른 견해를 가진 여러 철학자가 있고, 이들은 항상 서로 반박한다. 만일 진리가 다양한 경전을 읽음으로써, 논리적 주장으로, 혹은 철학적 이론으로 이해될 수 없다면 그것을 실제로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사실, 절대 진리에 관한 지혜는 매우 비밀스럽지만 우리가 권위를 따르면 이것을 이해할 수 있다.

인도에서는 라마누자짜리아, 마드바짜리아, 님바르까, 비쉬누스바미와 다른 위대한 성인들에게서 유래한 사제 전수가 있다. 베다 문헌은 뛰어난 영적 스승들을 통해 이해된다. 아르주나는 끄리쉬나로부터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했고, 우리 역시 이것을 이해하고 싶다면 다른 출처가 아닌 아르주나에게서 배워야 한다. 우리가 바가바드 기따를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그것이 아르주나가 이해한 것과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한다. 만일 바가바드 기따를 아르주나가 이해한 식으로 이해했다면 우리의 지식은 올바르다. 이것이 바가바드 기따 공부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실제로 우리가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 혜택을 얻고자 한다면 이 원칙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바가바드 기따는 서점에서 구매해 사전을 찾아가며 그냥 읽어 지식을 얻을 수 있는 평범한 책이 아니다. 그것은 가능하지 않다. 그렇다면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그 절대 과학이 사라졌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하기 위해 사제 전수를 받아야 하는 필요성을 이해하기란 어렵지 않다. 우리가 변호사나 기술자 혹은 의사가 되고 싶다면 권위 있는 변호사, 기술자, 의사에게서 지식을 얻어야 한다. 초보 변호사는 노련한 변호사의 수습생이 되거나 의사가 되려는 젊은이는 인턴이 되어 이미 의사 면허증을 받은 사람들과 함께 일해야 한다. 어떤 주제에 관한 우리 지식은 권위 있는 출처를 통해 얻지 않으면 완벽해질 수 없다.

지식을 얻는 두 가지 과정이 있다. 그것은 귀납적 과정과 연역적 과정이다. 연역법이 더 완벽하다고 여겨진다. “모든 사람은 죽는다.”라는 가정을 세우면 어째서 인간이 죽을 운명인지에 대해서 논의할 필요는 없다. 이것이 사실이라고 일반적으로 인정되었다. 연역법으로 “존슨 씨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존슨 씨는 죽을 것이다.”라는 결론을 맺는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전제는 어떻게 도출될 수 있는가? 귀납법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 전제를 실험과 관찰을 통해 결론 맺으려 한다. 따라서 이 사람이 죽었고, 저 사람이 죽었고 등 수없이 많은 사람이 죽은 것을 보고 일반화한 후에야 비로소 모든 사람은 죽는다는 결론을 내리는데 이런 귀납법의 가장 큰 결점은 바로 우리 경험이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죽지 않는 사람을 본 적이 없으면서도 한정된 우리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판단한다. 우리 감각은 제한된 능력을 지니고, 이런 조건부의 상태에서 수많은 결함 또한 지닌다. 귀납적 과정은 결과적으로 항상 완벽한 것이 아닌 것에 반해, 완벽한 지식을 갖춘 출처에서 나오는 연역적 과정은 완벽하다.

권위자들이 인정했음에도, 바가바드 기따에 나오는 구절 중 독단적으로 보이는 여러 구절이 있다. 예를 들면 제7장에서 스리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시기를,

맛따 빠라따람 난얏 mattaḥ parataraṁ nānyat
낀찟 아스띠 다난자야 kiñcid asti dhanañjaya
마이 사르밤 이담 쁘로땀 mayi sarvam idaṁ protaṁ
수뜨레 마니-가나 이바 sūtre maṇi-gaṇā iva

“오! 부의 정복자여, 나를 초월하는 진리란 없느니라. 실에 꿰인 진주처럼, 모든 것은 나에게 의존하느니라.”《바가바드 기따 7.7》     

스리 끄리쉬나께서 당신보다 더 위대한 권위는 없다고 하셨고, 이 말씀은 매우 독단적으로 들린다. 만일 내가 “나보다 더 위대한 자는 없다.”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오, 스와미가 아주 자만에 가득 찼군.”하고 생각할 것이다. 만일 결함이 아주 많은 자가 자기가 가장 위대하다고 한다면, 그는 신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러나 끄리쉬나께서 이 지구 상에 현현하셨을 동안에도 당신이 가장 위대한 자로 여겨졌다는 사실을 역사를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으므로 끄리쉬나께서는 이렇게 주장하실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모든 활동 분야에서 가장 위대하셨다.

베다 체계에 따르면, 가장 위대한 권위에서 얻은 지식은 완벽하다고 여겨진다. 베다에 따르면, 세 종류의 증거가 있다. 그것은 쁘라땩샤(pratyakṣa), 아누마나(anumāna), 샤브다(śabda)이다. 첫 번째는 직접적인 시각을 통해서이다. 누군가가 내 앞에 앉아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볼 수 있고 그가 거기에 앉아 있다는 내 지식은 내 눈을 통해 받은 것이 된다. 두 번째는 아누마나로 청각을 통해서다. 우리는 아이들이 밖에서 뛰어노는 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이것을 들음으로써 아이들이 거기에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세 번째 방법은 더 높은 권위로부터 얻은 진실을 수용하는 것이다. “사람은 죽는다”와 같은 말은 더 높은 권위에서 나왔다. 모두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만, 실제로 아무도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이것을 인정해야 한다. 만일 누군가 “누가 이 진실을 처음 찾았습니까? 당신이 발견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기 매우 곤란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그 지식은 전해 내려온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인다는 대답뿐이다. 지식을 얻는 이 세 방법 중에서 베다는 더 높은 권위로부터 얻는 세 번째 방법이 가장 완벽하다고 한다. 직접적 인지는 항상 불완전하고 특히 속박된 삶의 단계에서는 더 그러하다. 직접적 인지의 방법으로 우리는 태양은 그저 원반 같고 접시보다 크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과학자들로부터 태양이 지구보다 몇천 배나 더 크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권위자들의 말인 과학적 발표를 받아들여야 하나, 아니면 우리 자신의 감각을 받아들여야 하는가? 비록 우리 스스로 태양이 얼마나 큰지 증명할 수는 없지만 천문학자들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각 분야 권위자들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다. 신문과 라디오를 통해서도 어떤 사건이 중국과 인도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세계의 다른 곳에서도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다고 이해하고 있다. 이런 사건을 우리가 직접 경험하고 있지 않고, 그런 사건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지 어떤지 알지 못하지만, 신문과 라디오의 권위를 받아들인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권위를 믿어야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리고 그 권위가 완벽하면 우리의 지식도 완벽하다.

베다가 제공하는 정보에 따르면, 모든 권위 중 끄리쉬나가 가장 위대하고 완벽하다(맛따하 빠라따람 난얏 낀찟 아스띠 다난자야).  끄리쉬나 당신께서 스스로 가장 높은 권위라고 선언하실 뿐만 아니라 여러 위대한 성인들과 바가바드 기따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이것을 인정했다. 만일 끄리쉬나를 권위로 인정하지 않고, 당신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바가바드 기따에서 어떤 혜택도 얻을 수 없다. 독단적인 것이 아니라 사실이 그러하다.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세밀히 연구하면 모든 게 맞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고 인격신과 다른 견해를 지녔던 샹까라짜리아(Śaṅkarācārya) 같은 학자들도 끄리쉬나가 스바얌 바가반(svayaṁ bhagavān), 즉 지고의 신이라고 인정했다.

베다 지식은 최근에 발견된 지식이 아니다. 모두 오래전에 드러난 지식이다. 끄리쉬나는 베다를 뿌라따나하(purātanaḥ), 즉 고대의 지식이라 부르신다. 끄리쉬나께서는 수백만 년 전 이 요가를 태양신에게 말씀하셨고, 그보다 얼마나 수백만 년 전 당신께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말씀하셨는지 알 수 없다. 이 지식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매년 반복되듯이 항상 반복된다. 우리가 가진 지식의 깊이는 매우 얕아 5천 년 전 지구 역사조차 알지 못하지만 베다 문헌은 수백만 년 전의 역사까지도 제공한다. 우리가 3천 년 전 이 행성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다고 해서 그때 역사가 없었다고 결론지을 수 없다. 물론 끄리쉬나께서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고 부인할 수도 있다. 마하바라따에 근거해 끄리쉬나가 5천 년 전에 사신 분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고, 따라서 태양신에게 수백만 년 전 바가바드 기따를 설하셨을 가능성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만일 내가 수백만 년 전 태양에서 태양신에게 말했다고 하면, 사람들은 “스와미가 엉터리를 말하고 있군.”하고 이야기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끄리쉬나께는 적용되지 않는데, 왜냐하면 그는 최고 인격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끄리쉬나께서 바가바드 기따를 태양신에게 설하셨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믿든 안 믿든, 아르주나는 끄리쉬나의 말씀을 사실로 받아들였다. 아르주나는 끄리쉬나를 지고의 신으로 인정했고, 따라서 끄리쉬나께서 누군가에게 수백만 년 전 말씀하시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르주나 자신은 스리 끄리쉬나의 말씀을 전적으로 수용했지만, 후세를 위해 상황을 명백히 전하고자 이렇게 묻는다.

아빠람 바바또 잔마 aparaṁ bhavato janma
빠람 잔마 비바스바따하 paraṁ janma vivasvataḥ
까탐 에땃 비자니얌 katham etad vijānīyāṁ
뜨밤 아다우 쁘록따반 이띠 tvam ādau proktavān iti

태양신 비바스반은 생일로 볼 때 당신보다 훨씬 앞섭니다. 태초에 당신이 이 과학을 그에게 가르쳤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가바드 기따 4.4》     

실제로 이것은 매우 지적인 질문이고, 끄리쉬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바후니 메 뱌띠따니 bahūni me vyatītāni
잔마니 따바 짜르주나 janmāni tava cārjuna
따냐함 베다 사르바니 tāny ahaṁ veda sarvāṇi
나 뜨밤 벳타 빠란따빠 na tvaṁ vettha parantapa

“너와 나 둘 다 많고 많은 생을 거쳤느니라. 나는 그 모두를 기억할 수 있지만, 오 적을 무찌르는 자여! 너는 그럴 수 없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4.5》     

끄리쉬나께서는 절대신이지만, 여러 번 화신하셨다. 생명체인 아르주나 또한 여러 번 출생을 거듭했다. 최고 인격신과 생명체의 차이는 따니 아함 베다 사르바니(tāny ahaṁ veda sarvāṇi), 즉 끄리쉬나는 당신의 지난 화신을 모두 기억하시지만 생명체는 기억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것이 절대신과 인간의 차이점 중 하나이다. 절대신은 영원하고, 우리도 영원하다. 하지만 다른 점은 우리는 항상 몸을 바꾼다는 것이다. 죽음의 순간 우리는 일생에 있었던 일들을 모두 잊어버린다. 죽음은 망각을 의미한다. 그뿐이다. 밤에 잠잘 때 우리가 누구의 남편이고, 부인이고, 아버지이며, 누구의 자식인지에 대해 잊어버린다. 자는 동안 우리 자신을 잊지만 잠에서 깨면 “나는 이렇고 저렇고, 난 반드시 이것저것을 해야 하고.” 등을 기억한다. 전생에 우리가 다른 몸을 가졌고 아버지, 어머니 등 다른 가족 구성원이 있었고 다른 나라에서 살았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모든 것을 죽음을 맞으며 잊게 되었다. 어쩌면 우리는 개나 고양이, 사람, 데바였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무엇이었든 이제 모든 것을 잊고 말았다.

이렇게 변신을 거듭하지만 생명체로서 우리는 영원하다. 전생에 우리가 현재의 이 몸을 준비했듯이, 현생에 또 다른 몸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가 쌓은 까르마 혹은 행위에 따라 몸을 받게 된다. 선성(mode of goodness)에 있는 자들은 더 높은 행성으로 승격될 것이다(바가바드 기따 14.14). 동성(mode of passion)의 상태에서 죽은 자는 지구에 남고, 암성(mode of ignorance)의 상태에서 죽은 자는 동물 종류로 떨어지거나 낮은 행성으로 옮겨질 것이다(바가바드 기따 14.15). 이 과정이 계속되었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잊는다.

천국의 왕, 인드라(Indra)는 한때 그의 영적 스승을 화나게 했고, 영적 스승은 인드라에게 돼지로 태어나라는 저주를 했다. 그래서 인드라는 지구로 내려가 돼지가 됐고 천상의 왕국의 왕좌는 비어있게 되었다. 그 상황을 보고 브라흐마가 지구로 내려가 돼지에게 말했다. “친애하는 인드라여, 당신은 지구에 사는 돼지가 되었소. 당신을 이 상황에서 구해내기 위해 내가 왔소. 나와 즉시 갑시다.” 하지만 돼지는 이렇게 대답했다. “오, 난 당신과 함께 갈 수 없어요. 난 이곳에서 책임져야 할 일이 너무 많아요. 자식들, 부인, 그리고 멋진 돼지 사회가 있어서 함께 갈 수 없어요.” 브라흐마가 천국으로 다시 데려가 주겠다고 약속했는데도 돼지의 형태가 된 인드라는 거부했다. 이것이 망각이다. 마찬가지로 스리 끄리쉬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이 물질계에서 무엇을 하고 있니? 사르바-다르만 빠리땨쟈 맘 에깜 샤라남 브라자(Sarva-dharmān parityajya mām ekaṁ śaraṇaṁ vraja, 바가바드 기따 18.66).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를 온전히 보호해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셔도 우리는 이렇게 말한다. “난 당신을 믿지 않아요. 여기에 더 중요한 일들이 있어요.” 이것이 속박된 영혼들의 위치다. 이 망각은 사제 전수의 길을 따름으로써 신속히 없애버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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