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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구루(Guru)에 대한 믿음으로서의 지식과 끄리쉬나에게의 항복

바가바드 기따의 제4장에서 스리 끄리쉬나께서는 모든 희생(제사) 중 최고는 지식의 습득이라고 결론 내리신다.

   스레얀 드라비아-마얃 야갸 śreyān dravya-mayād yajñāj
갸나-야갸 빠란따빠 jñāna-yajñaḥ parantapa
사르밤 까르마킬람 빠르타 sarvaṁ karmākhilaṁ pārtha
갸네 빠리사마뺘떼 jñāne parisamāpyate

“오 적을 벌하는 자여, 지식으로 하는 희생은 단지 부를 희사하는 것보다 낫다. 결국,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모든 종류의 희생은 초월적 지식에서 궁극에 이르니라.”《바가바드 기따 4.33》       

  이 속박된 삶은 무지에서 비롯되었으므로 지식은 최고의 희생이다. 제사와 고행, 요가, 그리고 철학적 논의의 목적은 지식을 얻기 위함이다. 초월적 지식은 비인성적 측면의 절대신(브라흐만 깨달음: Brahman realization)에 대한 깨달음과 모든 생명체의 가슴과 각 원자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절대신(빠람아뜨마 혹은 초(超) 영혼에 대한 깨달음: Paramātmā or Supersoul realization)으로서의 깨달음, 지고의 인간인 최고인격신으로서의 깨달음(바가반 깨달음: Bhagavān realization)이란 세 단계의 깨달음으로 나뉜다. 하지만 지식을 얻는 첫 단계는 “나는 이 몸이 아니다. 나는 영혼이고 내 삶의 목적은 이 물질적 소용돌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를 이해하는 데서 시작된다. 요점은 우리가 하는 어떤 종류의 희생도 우리를 진정한 지식에 이르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장 높은 지식의 완성은 끄리쉬나께 항복하는 것 또는 다른 말로 완전한 바침(바후남 잔마남 안떼 갸나반 맘 쁘라빠댜떼: bahūnāṁ janmanām ante jñānavān māṁ prapadyate, 바가바드 기따 7.19)이라고 바가바드 기따가 말했다. 어리석지 않은 사람, 갸나반(jñānavān)은 끄리쉬나께 항복하며 그것이 가장 높은 지식의 단계다. 마찬가지로 바가바드 기따의 마지막에 스리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이렇게 권고하신다.

사르바-다르만 빠리따쟈 sarva-dharmān parityajya
맘 에깜 샤라남 브라자 mām ekaṁ śaraṇaṁ vraja
아함 뜨밤 사르바-빠뻬뵤 ahaṁ tvāṁ sarva-pāpebhyo
목샤이샤미 마 슈짜하 mokṣayiṣyāmi mā śucaḥ

“모든 형태의 종교를 버리고 오직 나에게 항복하라. 내가 너를 모든 죄업에서 구할 것이니라. 두려워하지 말라.” 《바가바드 기따 18.66》       

이것이 지식의 가장 비밀스러운 부분이다. 모든 관점에서 베다 문헌을 분석, 연구하면 지식의 정점은 끄리쉬나께 항복하는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어떤 형태의 항복이 권장되는가? 지식으로 가득한 항복을 권장한다. 즉, 우리가 완성에 이르면 바아수데바(Vāsudeva), 끄리쉬나가 모든 것이라는 완전한 지식으로 항복하게 된다. 이것은 브라흐마 삼히따에서도 입증되었다.

이스바라 빠라마 끄리쉬나하 īśvaraḥ paramaḥ kṛṣṇaḥ
삿-칟-아난다-비그라하 sac-cid-ānanda-vigrahaḥ
아나디르 아디르 고빈다하 anādir ādir govindaḥ
사르바-까라나-까라남 sarva-kāraṇa-kāraṇam

“고빈다로 알려진 끄리쉬나는 최고인격신이십니다. 당신은 영원하고 행복으로 가득하며 영적 몸을 갖고 계십니다. 당신은 모든 것의 기원입니다. 당신께 다른 기원은 없으며, 당신이 모든 원인의 근본 원인이십니다.” 《브라흐마 삼히따 5.1》       

사르바-까라나(sarva-kāraṇa)라는 단어는 끄리쉬나가 모든 원인의 원인이라는 사실을 가리킨다.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그의 아버지는 누구인지, 이런 식으로 우리의 선조를 계속해서 추적해 보면 지고의 아버지, 최고인격신에 도달할 것이다.

물론 모든 사람이 절대신을 당장 보고 싶어 하지만 우리가 자격을 갖추고 완벽한 지식을 갖추었을 때야 비로소 당신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듯 그렇게 절대신을 직접 눈으로 볼 수 있지만 그렇게 되려면 자격이 필요하고, 그 자격이 끄리쉬나 의식이다. 끄리쉬나 의식은 스라바남, 즉 바가바드 기따와 다른 베다 문헌을 통해 끄리쉬나에 관해 듣는 것과 끼르따남, 즉 들은 것을 반복하고 끄리쉬나의 이름을 찬미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끄리쉬나에 관해 듣고 구송함으로써 우리는 실제로 끄리쉬나와 함께할 수 있는데, 당신의 이름과 특성, 형상, 그리고 유희는 완전하고 끄리쉬나 당신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끄리쉬나와 함께하면 우리가 당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신이 도와주시고 지식의 빛으로 암흑과 무지를 쫓아내 주신다. 끄리쉬나께서는 우리 가슴 속에 앉아계시며 구루(영적 스승)의 역할을 하신다. 당신에 관한 주제를 듣기 시작하면 수년간 물질적 오염으로 쌓인 먼지가 조금씩 씻겨나간다. 끄리쉬나께서는 모든 이의 친구이지만 당신의 헌애자에게는 특별한 친구이시다. 우리가 당신에게 조금 이끌리기 시작하자마자, 당신께서 우리 가슴속에서 호의적인 가르침으로, 우리가 영적으로 점점 발전할 수 있게 해 주신다. 끄리쉬나가 우리 가슴속에 계신 첫 영적 스승이시고 끄리쉬나에 관해 더 알고 싶어 지면 끄리쉬나를 섬기는 사두 혹은 성인을 찾아가 가슴 밖에 계시는 스승으로 모셔야 한다. 이것은 스리 끄리쉬나 당신께서 다음 절에서 명령하신 바이다.

땃 빗디 쁘라니빠떼나 tad viddhi praṇipātena
빠리쁘라스네나 세바야 paripraśnena sevayā
우빠덱샨띠 떼 갸남 upadekṣyanti te jñānaṁ
갸니나스 땃뜨바-다르시나하 jñāninas tattva-darśinaḥ  

“영적 스승에게 다가가 진리를 배우려고 노력하라. 그에게 겸손하게 묻고 봉사하라. 자아를 깨달은 영혼은 진리를 이미 보았기에 네게 그 지식을 나누어 줄 수 있느니라.”《바가바드 기따 4.34》       

우리가 항복할 사람을 선택하는 것은 필수이다. 물론 아무도 누구에게 항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지식이 무엇이든 우쭐대며 이런 태도를 보인다. “오, 누가 내게 지식을 줄 수 있겠어?” 어떤 사람들은 영적 깨달음을 위해 영적 스승 따윈 필요 없다고 하지만 베다 문헌에 따르면, 그리고 바가바드 기따, 스리마드 바가바땀과 우빠니샤드에 따르면 영적 스승은 필요하다. 물질계에서도 누군가가 음악가가 되고 싶다면 자기를 가르칠 음악가를 찾아야 하고, 기술자가 되고 싶으면 기술학교에 가 그 기술을 아는 자에게서 배워야 한다. 서점에서 책을 사서 집에서 혼자 읽는 것만으로 의사가 되지 않는다. 의대에 입학하여 의사 면허증을 취득한 사람 밑에서 수련을 받아야 한다. 어떤 주요 과목도 책을 사서 집에서 혼자 공부한다고 배워지지 않는다. 누군가가 책에서 찾은 지식을 어떻게 적용하는지 우리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다. 절대신의 과학에 관한 한, 최고인격신 스리 끄리쉬나 당신께서 직접 우리가 항복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가라고 충고하신다. 이 말은 영적 스승이 될 사람이 바가바드 기따와 절대신에 관한 깨달음을 설명하는 문헌들이 주는 가르침을 실제 줄 수 있는지 검사해봐야 한다는 의미이다. 영적 스승을 우리 마음대로 찾으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는 매우 진지하게 그 주제에 관해 지식이 있는 자를 찾아야 한다.

바가바드 기따의 초반에 아르주나는 끄리쉬나와 마치 친구처럼 대화를 나누고 있고, 끄리쉬나께서는 전사인 아르주나가 어떻게 싸움을 포기하려 할 수 있는지 묻고 있다. 그러나 아르주나가 이 격의 없는 대화가 자기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을 거라 이해하고 끄리쉬나께 항복하며 시샤스 떼 ’함 샤디 맘 뜨밤 쁘라빤남(śiṣyas te 'haṁ śādhi māṁ tvāṁ prapannam)이라고 말한다. “이제 저는 당신의 제자이며 당신께 항복한 영혼입니다. 제발 저에게 가르침을 주소서(바가바드 기따 2.7).” 이것이 바른 과정이다. 맹목적으로 항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을 이용해 질문해야 한다.

아무런 질문 없이 발전할 수 없다. 학교에서 교사에게 질문하는 학생이 보통 똑똑한 학생이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오, 이건 뭐예요? 저건 뭐예요?”하고 물을 때 일반적으로 이것이 지성의 표시로 여겨진다. 우리에게 아주 훌륭한 영적 스승이 있다고 해도 질문하지 않는다면 영적으로 진보할 수 없다. 하지만 질문이 도전적이어서는 안 된다. “이제 이 영적 스승이란 사람이 어떤 자인지 알아보자. 내가 도전해 보겠다.”라는 식의 마음가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의 질문(빠리쁘라스네나: paripraśnena)은 봉사(세바야: sevayā)에 관한 주제여야 한다. 봉사 없는 지식은 쓸데없고, 질문하기 전에 우리는 어느 정도의 자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보석상에 가서 금이나 보석을 살 때 금이나 보석에 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사기당할 가능성이 높다. 보석상에 가서 “다이아몬드를 주시겠어요?”라고 하면 주인은 손님이 바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다이아몬드가 아닌 아무 보석에 아무 가격이나 부를 수 있다. 그런 식의 검사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먼저 어느 정도의 지성을 갖추지 않으면 영적 진보를 이룰 수 없다.

베단따-수뜨라의 첫 지시 사항은 아타또 브라흐마 지갸사(athāto brahma jijñāsā)이다. “이제 브라흐만에 대해 질문할 때다.” 아타(atha)라는 단어의 의미는 물질적 삶에서 초래되는 기본적 좌절을 깨달은 지적인 사람이란 뜻이고 이런 사람은 이 질문할 능력이 있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은 영적 스승에게 ‘이 어둠을 넘어선’ 주제에 관해 질문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물질계는 본성이 어둡고 불에 의해 인위적으로만 빛을 낸다. 우리의 지식은 이 우주를 넘어선 초월적인 세계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이 영적 세계들에 관해 간절히 알고 싶다면 반드시 영적 스승을 찾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지식을 찾아낼 방법이 없다. 물질적 진보를 위해 바가바드 기따나 베단따 수뜨라를 공부하고 싶다면 영적 스승을 찾을 필요가 없다. 먼저 브라흐만에 관해 알고 싶어 해야 하고 그 후 절대 진리(갸니나스 땃뜨바-다르시나하, 바가바드 기따 4.34)에 관한 완벽한 이해를 갖춘 스승을 찾아야 한다. 끄리쉬나는 최고의 땃뜨바(tattva), 즉 절대 진리다. 바가바드 기따의 제7장에서 스리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신다.

마누샤남 사하스레슈 manuṣyāṇāṁ sahasreṣu
까스찟 야따띠 싣다예 kaścid yatati siddhaye
야따남 아삐 싣다남 yatatām api siddhānāṁ
까스찐 맘 벳띠 땃뜨바따하 kaścin māṁ vetti tattvataḥ

“수천의 사람들 중 단 한 사람만이 완성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 이렇게 완성을 이룩한 자들 중 진실로 나를 아는 자는 드물다.”《바가바드 기따 7.3》       

따라서 완성을 이룬 수많은 영성가(spiritualists) 가운데 한 명만이 실제로 끄리쉬나가 무엇인지에 관해 알 것이다. 이 구절이 가리키듯, 끄리쉬나에 관한 주제는 쉽지 않고 사실 무척 어렵다. 하지만 바가바드 기따는 그것이 쉽다고도 말한다.

박땨 맘 아비자나띠 bhaktyā mām abhijānāti
야반 야스 짜스미 땃뜨바따하 yāvān yaś cāsmi tattvataḥ
따또 맘 땃뜨바또 갸뜨바 tato māṁ tattvato jñātvā
비샤떼 따드-아난따람 viśate tad-anantaram

“오직 봉헌으로 최고인격신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헌애로 나에 관한 의식으로 가득할 때 절대신의 왕국에 들어올 수 있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18.55》       

봉헌의 과정을 받아들이면 아주 쉽게 끄리쉬나를 이해할 수 있다. 봉헌을 통해 끄리쉬나의 과학을 완벽히 이해할 수 있고 영적 왕국에 들어갈 자격도 얻게 된다. 바가바드 기따가 말하듯, 수많은 출생을 거듭한 후 결국 끄리쉬나께 항복해야 한다면 왜 지금 당장 당신께 항복하지 않는가? 왜 수많은 출생을 기다리는가? 항복이 완성의 마지막이라면 이 완성을 어째서 바로 받아들이지 않는가? 물론 그에 대한 대답은 사람들은 대체로 의심이 많기 때문이다. 끄리쉬나 의식은 1초 만에 달성할 수도 있고, 수천 번의 생사를 반복하고도 얻을 수 없을 수도 있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끄리쉬나께 항복함으로써 즉시 위대한 영혼이 될 수 있지만, 끄리쉬나가 실제 가장 높은 신인지 아닌지 의심을 하므로 경전을 통해 이런 의문을 없애는 데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 진정한 영적 스승의 지도를 받으며 바가바드 기따를 공부함으로써 이런 의심을 없앨 수 있고 확실한 발전을 이룰 수 있다.

지식의 횃불이 모든 종류의 의심과 결실적 행위를 태워 재로 만든다. 스리 끄리쉬나께서 실제 진리를 본 자에게서 지식을 얻은 결과에 관해 다음과 같은 정보를 제공해 주신다.  

야 갸뜨바 나 뿌나르 모함 yaj jñātvā na punar moham
에밤 야샤시 빤다바 evaṁ yāsyasi pāṇḍava
예나 부따니 아셰사니 yena bhūtāny aśeṣāṇi
드락샤시 아뜨마니 아토 마이 drakṣyasy ātmany atho mayi

아삐 쩻 아시 빠뻬뱌하 api ced asi pāpebhyaḥ
사르베뱌하 빠빠-끄릿따마하 sarvebhyaḥ pāpa-kṛttamaḥ
사르밤 갸나-쁠라베나이바 sarvaṁ jñāna-plavenaiva
브리지남 산따리샤시 vṛjinaṁ santariṣyasi

야타이담시 사밋도’ 그니르 yathaidhāṁsi samiddho 'gnir
바스마삿 꾸루떼’르주나 bhasmasāt kurute 'rjuna
갸나그니히 사르바-까르마니 jñānāgniḥ sarva-karmāṇi
바스마삿 꾸루떼 따타 bhasmasāt kurute tathā

“자아를 깨달은 영혼에게서 진정한 지식을 얻으면, 이 지식으로 모든 생명체는 절대자의 일부라는 사실, 즉 그들은 내 것임을 알 수 있기에 다시는 환영에 빠지지 않을 것이니라. 네가 모든 죄인 가운데 가장 무거운 죄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초월적 지식의 배에 오르게 되면, 고통의 바다를 건널 수 있을 것이다. 훨훨 타오르는 불이 땔나무를 재로 만들듯이, 오 아르주나여, 지식의 불은 물질적 행위의 모든 과보를 태워 재로 만드니라.” 《바가바드 기따 4.35~37》       

지식의 횃불은 영적 스승에 의해 점화되고, 그것이 불타오르면 우리 행위의 모든 과보가 재로 변한다. 우리 행위의 과보 혹은 까르마는 우리가 속박되는 원인이다.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가 있지만 이 구절에서 사르바-까르마니(sarva-karmāṇi )라는 단어는 이 둘 다를 가리킨다. 이 물질적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은 자에게는 좋고 나쁜 행위 둘 다의 과보가 이롭지 않다. 이 물질계에서 우리가 선성에 있으면 좋은 행위를 하는 것에 집착한다. 그러나 동성과 암성에 있는 자는 열정과 무지로 나쁜 행위를 한다. 하지만 끄리쉬나 의식이 되려는 자는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 좋은 행위를 함으로써 귀족이나 부유한 가정에서 좋은 출생을 할 수 있고, 나쁜 행위를 함으로써 동물의 왕국이나 타락한 인간의 가정에서 태어날 수 있지만 어떤 경우에도 출생은 속박을 의미하고, 끄리쉬나 의식이 되려고 노력하는 자는 윤회의 속박에서 벗어나려 분투한다. 물질적 고통이 없어지지 않는데 부유하거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는 것이 뭐가 이로운가? 선행의 과보를 즐기든 악행의 과보로 괴로워하든 물질적 육신을 받아야 하고, 그 결과 물질적 고통을 겪는다.

끄리쉬나를 향한 초월적 봉사를 함으로써, 우리는 실제로 생사의 윤회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의 횃불이 우리 마음속에서 타고 있지 않으므로 물질적 존재를 행복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개나 돼지는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삶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다. 오히려 자기가 삶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하고, 이러한 생각을 물질적 에너지의 덮개 혹은 환영(마야)의 영향이라 한다. 바우어리(뉴욕의 한 지역)에는 수많은 술주정뱅이가 길에 드러누워 있고 그들은 모두 “우리는 삶을 즐기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들 옆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 사람들은 엄청나게 불행한 사람들이군.”하고 생각한다. 그것이 환영 에너지다. 우리는 고통스러운 조건에 속박되어 있지만 무척 행복하다고 착각하며 받아들인다. 이것을 무지라고 한다. 그러나 지식의 도움으로 의식이 깨어나면, “오, 나는 행복하지 않다. 난 자유를 원하는데 자유는 어디에도 없다. 난 죽고 싶지 않은데 죽음이 있다. 늙고 싶지 않은데 늙는다. 병에 걸리기 싫은데 병에 걸린다.”라고 생각한다. 이런 것이 인간 존재의 주요 문제이지만, 우리는 이를 무시하고 아주 작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집중한다. 경제 발전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고, 이 물질계에서 얼마나 오래 살 수 있는지는 잊어버린다. 경제 발전을 이룩했든 하지 않았든 60대의 마지막이나 혹은 100세가 되면 인생은 끝난다. 수백만 달러를 모았어도 이 육신을 떠날 때 모든 것을 남겨두고 떠난다. 물질계에서는 무엇을 하든 물질적 본성의 영향으로 패배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자유를 원하고 전 세계와 전 우주를 여행하고 싶어 한다. 실제로 그것이 영혼으로서 우리가 가진 권리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영혼은 사르바-가따하(sarva-gataḥ)로 불리고, 이것은 원하는 곳 어디든 갈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자란 뜻이다. 싣따로까(Siddhalokas)에는 자기들이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비행기나 다른 기계적 고안품 없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완벽한 존재 혹은 요가행자들이 있다. 물질적 조건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매우 강력해질 수 있다. 실제로 영적 불꽃(spiritual sparks)으로서의 우리가 얼마나 강력한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대신 이 지구에 머무는 데 무척 만족스러워하며 몇 척의 우주선을 보내고 우리가 이룩한 물질적 과학이 아주 진보한 것처럼 생각한다. 수백 수천만의 달러를 쓰며 우주선을 만들지만 우리가 원하는 어디든 공짜로 여행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한다.

요점은 지식으로 영적 힘을 배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식은 이미 있고 우리가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 앞선 시대의 사람들은 지식을 얻기 위해 엄청난 고행과 금욕을 했지만 이 시대에 이 과정은 우리 수명이 너무 짧고 항상 혼란스러운 상황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다. 이 시대에 권장된 과정은 끄리쉬나 의식 과정으로 스리 짜이따냐 마하쁘라부께서 시작하신 하레 끄리쉬나 만뜨라를 구송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통해 지식의 횃불을 태울 수 있고 우리가 쌓은 모든 과보는 재로 사그라들며 정화된다.

나 히 갸네나 사드리샴 na hi jñānena sadṛśaṁ
빠비뜨람 이하 비댜떼 pavitram iha vidyate
땃 스바얌 요가-삼싣다하 tat svayaṁ yoga-saṁsiddhaḥ
깔레나뜨마니 빈 다띠 kālenātmani vin dati

“이 세상에서 초월적 지식만큼 장엄하고 순수한 것은 없느니라. 이 지식은 모든 신비로움의 숙성한 열매이다. 봉헌의 실천을 완성한 자는 때가 되면 자기 안에서 이 지식을 즐기게 되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4.38》       

 무엇이 숭고하고 순수한 지식인가? 그것은 우리가 절대신의 부분이고 최고 의식과 우리 의식을 긴밀히 연결해야 한다는 지식이다. 이것이 이 물질계에서 가장 순수한 지식이다. 이곳에서는 모든 것이 물질적 본성, 즉 선성, 동성, 암성에 의해 더럽혀져 있다. 선성 또한 오염의 한 종류이다. 선성에서 인간은 자기 위치와 초월적 주제 등에 대해 인식하게 되지만 그런 인간조차도 “이제 나는 모든 것을 이해했다. 이제 나는 아무 문제없다.”라고 생각하는 결함이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곳에 계속 남고 싶어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선성에 있는 자는 일류 수감자가 되고 감옥에 있는 것을 행복해하며 그곳에 머물고 싶어 한다. 동성과 암성에 있는 자들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요점은 선성의 양태 또한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초월적 위치는 아함 브라흐마스미(ahaṁ brahmāsmi), 즉 “나는 이 물질이 아니라 영혼이다”를 깨닫는 것에서 비롯된다. 하지만 이런 위치조차도 안전하지 않다. 더 많은 깨달음이 필요하다.

브라흐마-부따하 쁘라산나뜨마 brahma-bhūtaḥ prasannātmā
나 쇼짜띠 나 깡샤띠 na śocati na kāṅkṣati
사마하 사르베슈 부떼슈 samaḥ sarveṣu bhūteṣu
맛-박띰 라바떼 빠람 mad-bhaktiṁ labhate parām

“따라서 초월적 경지에 오른 자는 즉시 지고의 브라흐만을 깨닫는다. 그런 자는 어떠한 것에도 절대 비탄하거나 무엇을 바라지도 않으며 모든 생명체를 똑같이 대하느니라. 바로 그런 경지에 올라야 나를 향한 순수한 봉헌을 할 수 있게 된다.” 《바가바드 기따 18.54》       

브라흐마-부따하 경지에서는 자기를 물질과 더는 동일시하지 않는다. 브라흐마-부따하의 경지에 오른 자의 첫 징후는 즐겁게 되는 것이다(쁘라산나뜨마: prasannātmā). 그 상태에서는 비탄도, 갈망도 없다. 그러나 그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끄리쉬나를 사랑으로 섬기지 않으면 물질적 소용돌이 속으로 다시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하늘 위에 아주 높이 올라도 거기에 은신처가 없으면, 즉 어떤 행성에 착륙하지 않으면 도로 떨어질 것이다. 끄리쉬나의 연꽃 같은 발에 은신하지 않는 한 브라흐마-부따하 경지를 그저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끄리쉬나를 향한 봉헌에 종사하자마자 물질계에 다시 떨어질 가능성은 절대 없다.  

우리의 본성은 어떤 용무를 원한다. 아이가 장난을 쳐도, 다른 용무를 주지 않는 한 장난을 그만두지 못한다. 아이에게 어떤 장난감을 주면 아이의 관심은 장난감으로 옮겨가고, 장난스러운 행동은 끝이 난다. 우리는 장난기 많은 아이들과 같고, 따라서 우리에게는 반드시 영적 용무가 주어져야 한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이해하는 것만으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영혼이라고 이해하고 영적 용무를 통해 그 영혼을 유지해야 한다. 인도에서는 모든 물질적 용무를 포기하고 집과 가족을 떠나 버리는 삶의 단계, 즉 산냐사를 받고 얼마간 명상한 후 병원을 열거나 정치에 관여함으로써 박애주의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기 드물지 않다. 병원 개설은 정부가 하는 일이다. 산냐사의 의무는 사람들이 물질적 육신을 실제로 없앨 수 있도록 하는 병원을 짓는 것이지, 그 몸을 꿰매는 병원을 짓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진정한 영적 행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물질적 행위를 한다.

끄리쉬나 의식을 완벽히 갖추게 되면 지식과 지혜는 때가 되면 얻어진다. 처음에는 낙담하는 일도 있겠지만, 깔레나(kālena)란 단어는 ‘때가 되면’을 의미하고 계속해서 인내하면 성공할 것이다. 다음 절에서 명시하듯 믿음이 필요하다.

스랏다발 라바떼 갸남 śraddhāvāḹ labhate jñānaṁ
땃-빠라하 삼야뗀드리야하 tat-paraḥ saṁyatendriyaḥ
갸남 랍드바 빠람 샨띰 jñānaṁ labdhvā parāṁ śāntim            
아찌레나디갓차띠 acireṇādhigacchati                  

“초월적 지식에 헌신하며 자기감각을 억제하는 충실한 자는 그런 지식을 얻을 자격이 있으며, 그것을 얻은 후에는 즉시 최상의 영적 평온에 이르느니라.”《바가바드 기따 4.39》       

주저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 끄리쉬나 의식은 매우 어렵다. 심지어 일상생활에서조차 어느 정도의 믿음은 필요하다. 우리가 비행기 표를 살 때 항공사가 우리를 목적지까지 데려다줄 거라 믿는다. 믿음 없이는 이 물질계에서조차 살 수 없는데 영적 발전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권위를 믿어야 한다. 허가되지 않은 회사에 우리 표를 예약해서는 안 된다. 믿음은 반드시 바가바드 기따를 말씀하신 끄리쉬나께 가져야 한다. 어떻게 하면 믿음이 깊어질 수 있는가? 감각의 통제가 필요하다(삼야뗀드리야하: saṁyatendriyaḥ). 우리는 우리 감각을 만족시키고 싶어 물질계에 있다. 의사가 우리를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고 치자. 의사가 이런저런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하는데 아무거나 먹는다면 과연 의사를 믿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가 주치의를 믿는다면 그의 치료 사항을 따를 것이다. 요점은 그 지시 사항을 믿고 따르는 데 있다. 그러면 지혜를 얻을 수 있다. 지혜를 얻은 경지에 이르면 결과는 빠람 샨띰(parāṁ śāntim), 즉 최고의 평온을 얻는 것이다. 감각을 통제하면 믿음은 가까운 미래(아찌레나: acireṇa)에 온다고 끄리쉬나께서 알려주셨다. 끄리쉬나께 믿음을 가지는 경지에 도달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기분이 든다. 그것이 우리의 위치다. 처방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믿음을 가지고 실행해 나가야 한다. 이 믿음은 반드시 최고 권위에 바탕을 두어야 하지, 삼류 인간에게 두어선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영적 스승을 찾아야 한다. 끄리쉬나가 가장 권위 있는 최고 인간이지만, 끄리쉬나 의식에 완벽히 임한 자는 끄리쉬나의 진정한 대리인이므로 끄리쉬나 의식인 누구라도 영적 스승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끄리쉬나의 대리인이 주는 가르침을 맛본 자는 마치 진수성찬을 먹고 만족하는 마냥 만족감을 느낄 것이다.

아갸스 짜스랏다다나스 짜 ajñaś cāśraddadhānaś ca
삼샤야뜨마 비나샤띠 saṁśayātmā vinaśyati
나얌 로꼬’스띠 나 빠로 nāyaṁ loko 'sti na paro
나 수캄 삼샤야뜨마나하 na sukhaṁ saṁśayātmanaḥ

“그러나 밝혀진 경전을 의심하는 무지하고 믿음 없는 자들은 신의식에 이르지 못하느니라. 그들은 타락한다. 의심하는 영혼에게는 이 세상에도, 다음 세상에도 행복은 없다.” 《바가바드 기따 4.40》       

이 지식의 길을 가는 데 주저하는 자들에게 기회는 없다. 망설임은 무지에서 비롯된다(아갸스 짜: ajñaś ca). 끄리쉬나 의식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는 자는 이 물질계에서조차 행복할 수 없는데, 내생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물질계는 이미 비참하지만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더욱 비참할 것이다. 따라서 믿음 없는 자들은 매우 위태로운 상황에 부닥쳐 있다. 우리는 은행이 망하지 않을 것이란 믿음에 수천만 원을 저축한다. 은행과 항공사는 믿으면서 수많은 베다 문헌과 수많은 성인이 최고의 권위로 인정한 스리 끄리쉬나께는 왜 믿음을 갖지 못하는가? 우리는 샹까라짜리아, 라마누자짜리아, 짜이따냐 마하쁘라부 같은 위대한 권위의 발자취를 따라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다하고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데 믿음을 가지면 성공은 보장된다.

앞서 명시했듯이 우리는 절대 진리를 본 사람을 반드시 찾아 가 그에게 복종하고 그를 섬겨야 한다. 이것을 실행하면 영적 구제는 보장된다. 모두 절대신을 보는 데 안달이 나 있지만, 현 단계의 삶에서 우리는 속박되고 현혹되어 있다. 우리는 현상을 실제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실제 우리는 브라흐만이고 본성이 즐겁지만, 어떤 연유로 본원적 위치에서 떨어져 나갔다. 우리의 본성은 삿-칫-아난다, 즉 영원하고 행복하며 지식으로 충만하지만, 이 몸은 죽게 되어 있고 몸이 살아있는 동안은 무지와 고통으로 가득하다. 감각은 불완전하고 그런 감각을 통해 완벽한 지식을 얻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바가바드 기따에서는 우리가 정말 초월적 지식을 원한다면 절대 진리를 이미 본 자에게 다가가야 한다고 명시한다(딷-빋디 쁘라니빠떼나; tad-viddhi praṇipātena). 전통적으로 브라흐마나들은 영적 스승을 의미하지만, 이 깔리 시대에서 자격을 갖춘 브라흐마나를 찾는 것은 몹시 어렵다. 그 결과, 자격을 갖춘 영적 스승을 찾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쩨따냐 마하쁘라부께서 “끼바 비쁘라, 끼바 냐시, 슈드라 께네 나야/ 예이 끄리쉬나-땃뜨바-벳따, 세이 ‘구루’ 하야(kibā vipra, kibā nyāsī, śūdra kene naya/yei kṛṣṇa-tattva-vettā, sei 'guru' haya)”, 즉  “브라흐마나든 슈드라든 산냐시든 가정인이든 상관없다. 끄리쉬나의 과학을 아는 자가 진정한 영적 스승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바가바드 기따는 끄리쉬나의 과학이고 자신의 논거와 감각, 철학적 지식을 모두 동원해 세심히 공부하면 그 과학을 알게 될 것이다. 맹목적으로 항복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영적 스승이 깨달은 자이고 절대 진리에 도달한 자이지만 모든 영적 사항을 이해하려면 그에게 질문해야 한다. 실제로 끄리쉬나의 과학에 관한 질문에 대답해 줄 수 있으면 어떤 태생인지 신분인지에 상관없이, 다른 말로 하면 브라흐마나이든 슈드라든 미국인이든, 인도인이든 뭐든 상관없이 그 사람이 영적 스승이다. 의사한테 갈 때 의사가 힌두인지 기독교인인지 브라흐마나인지 묻지 않는다. 의학적 자격을 갖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가 “의사 선생님, 저를 치료해 주세요. 너무 고통스러워요.”라고 말하며 의사에게 전적으로 의지한다.

끄리쉬나는 영적 과학의 궁극적 목표다. 물론 끄리쉬나를 말할 때, 절대신을 의미한다. 전 세계와 전 우주에는 신의 여러 이름이 존재하지만 끄리쉬나는 베다 지식에 따르면 가장 높은 이름이다. 그러므로 짜이따냐 마하쁘라부께서는 하레 끄리쉬나, 하레 끄리쉬나, 끄리쉬나 끄리쉬나, 하레 하레/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를 이 시대에 깨달음을 얻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권장하셨다. 짜이따냐 마하쁘라부께서는 카스트나 사회 계급에 따른 차별을 두지 않으셨다. 실제로 당신의 수제자들은 사회에서 비천한 신분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이다. 짜이따냐 마하쁘라부께서는 심지어 회교도 출신의 하리다사 타꾸라(Haridāsa Ṭhākura)를 나마짜리아(nāmācārya) 혹은 절대신의 이름을 가르치는 지도 교사라고 임명했다. 마찬가지로, 짜이따냐 마하쁘라부의 중요한 두 명의 제자, 루빠 고스와미(Rūpa Gosvāmī)와 사나따나 고스와미(Sanātana Gosvāmī) 역시 이전에 사까라 말리까와 다비라 카사란 이름으로 회교도 정부에서 일하던 자였다. 그 시대 힌두인들은 매우 엄격해서 브라흐마나가 힌두가 아닌 자들에게 어떤 종류의 봉사라도 받으면 그 사람은 즉시 힌두 사회에서 배척당했다. 그런 관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짜이따냐 마하쁘라부께서는 루빠 고스와미와 사나따나 고스와미를 끄리쉬나 과학의 주된 권위자로 만드셨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도 차별은 없고 누구라도 끄리쉬나의 과학을 나눠 줄 수 있으면 영적 스승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유일한 자격이고, 이 과학의 정수는 바가바드 기따에 담겨 있다. 현시점에는 이 위대한 과학을 온 세상에 전하기 위한 수천 명의 영적 스승이 필요하다.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말씀하실 때 이 대화는 아르주나 한 명한테만 하는 말씀이 아니라 전 인류에게 하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스리 끄리쉬나께서 직접 끄리쉬나의 과학을 아는 것만으로 아르주나는 환영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 선포하신다(야 갸뜨바 나 뿌나르 모함: yaj jñātvā na punar moham). 우리에게 아주 훌륭한 배가 있다면 대서양을 쉽게 건널 수 있다. 현재 우리는 무지의 바다 한가운데 있고, 이 물질계는 거대한 무지의 바다와 같다. 그러므로 짜이따냐 마하쁘라부께서 끄리쉬나께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이 난다-따누자 낑까람 ayi nanda-tanuja kiṅkaraṁ
빠띠땀 맘 비사메 바밤부다우 patitaṁ māṁ viṣame bhavāmbudhau
끄리빠야 따바 빠다-빵까자- kṛpayā tava pāda-paṅkaja-
스티따-둘리-사드리샴 비찐따야 sthita-dhūlī-sadṛśaṁ vicintaya

“오 난다 마하라자의 아들이시여, 저는 당신의 영원한 종이나 어떤 연유로 생사의 바다에 빠졌습니다. 제발 저를 이 죽음의 바다에서 건져내시어 당신의 연꽃 같은 발의 한 티끌로 남게 해주세요.” 《식샤스따까 5》       

완벽한 지식의 배가 있으면 대양을 아주 쉽게 건널 수 있기에 두려움은 없다. 가장 죄 많은 자라도 끄리쉬나의 과학이란 배를 받으면 대양을 아주 쉽게 건널 수 있다. 앞서 명시했듯이 [바가바드 기따 4.36], 지난 삶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무지했으므로 진저리날 정도의 수많은 죄를 지었을 수 있다. 실제로 누구도 죄짓는 행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바가바드 기따에 따르면 이것은 문제 되지 않는다. 끄리쉬나의 과학을 아는 것만으로도 자유로워진다.

그러므로 지식을 구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지식의 완성은 끄리쉬나를 이해하는 것이다. 오늘날 수많은 이론이 있고 다들 살아가는 데 가장 좋은 방식을 안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수많은 ‘주의(ism)’가 발전했다. 이 중 사회주의는 세상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스리마드 바가바땀에서 영적 사회주의의 씨앗을 발견할 수 있다. 나라다 무니가 설명하기를, 이 물질적 우주에서, 즉 가장 낮거나 중간, 혹은 가장 높은 행성 체계에 있든, 심지어 공간밖에 있든, 모든 천연자원은 지고의 신에게서 발현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무엇이든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라 전부 절대신이 창조했다는 사실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정신이 올바른 사람이라면 이것을 부인할 수 없다. 스리 이쇼빠니샤드가 이렇게 명한다.

이사바샴 이담 사르밤 īśāvāsyam idaṁ sarvaṁ
얏 낀짜 자가땸 자갓 yat kiñca jagatyāṁ jagat
떼나 땩떼나 분지타 tena tyaktena bhuñjīthā
마 그리다하 까샤 스빋 다남 mā gṛdhaḥ kasya svid dhanam

“우주 안에 있는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은 지고의 신께서 소유하고 통제하신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필요한 것만 자기 몫으로 취하고, 다른 것은 누구에게 속하는지 숙지하여 그 이상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따라서 브라흐마를 시작으로 가장 높은 데바에서 가장 낮은 개미까지 모든 생명체는 천연자원을 사용할 권리가 있다. 나라다 무니가 지적했듯이 이 자원을 우리가 필요한 만큼 사용할 수 있지만 필요 이상으로 취하면 도둑이 된다. 불행히도 모든 사람이 정복하고 지배하려 애쓴다. 달에 가려는 국가 간의 시합은 자기 나라의 국기를 꽂고 자기 행성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유럽인들이 미국에 왔을 때 그들의 국기를 꽂고 미국이 자기들 나라라고 주장했다. 이 국기 심기와 국기 흔들기는 모두 무지 탓이다. 국기를 꽂고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생각지도 않는다. 그 모든 곳은 우리 소유가 아니라 절대신의 것이다. 이것을 아는 것이 지식이고, 내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지이다. 우리에게는 사용할 권리가 있지, 내 것이라 주장하거나 축적할 권리는 없다.

곡식이 든 자루를 길에 던지면 비둘기들이 와서 네다섯 알 정도를 먹고는 가 버린다. 그들이 먹을 수 있는 양 이상으로는 더 먹지 않으며 먹은 후에는 자유롭게 가던 길을 간다. 그러나 밀가루가 든 포대 여러 개를 보도에 두고 사람들에게 와서 가져가라 하면, 한 사람이 10포대 혹은 12포대를 가지고 갈 것이고 다른 사람은 15 혹은 30포대, 그 이상도 가져갈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많이 운반할 수단이 없는 사람은 한두 포대 이상은 가져가기 어려울 것이다. 따라서 분배는 불균등해진다. 그러나 이것을 문명의 발전이라 부른다. 우리에게는 비둘기나 개, 고양이마저 가지고 있는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 모든 것은 지고신께 속하고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그것이 지식이다. 절대신께서 마련해 주신 덕에 세상은 어떤 것도 결핍되어 있지 않다. 우리가 분배하는 법을 안다면 모든 것은 충분하다. 그러나 오늘날의 비참한 상태는 누군가는 필요한 이상 너무 많이 가지고 있고, 다른 이들은 굶주리는 데에서 비롯됐다. 따라서 굶주리는 대중은 반란을 일으키며 “우리가 왜 굶주려야 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그들의 방법은 불완전하다. 완벽한 영적 사회주의는 모든 것이 절대신께 속한다는 지식 안에서 찾을 수 있다. 끄리쉬나의 과학을 앎으로써 우리는 거짓 소유권이란 무지를 쉽게 극복할 수 있다.

우리는 사실 무지 탓에 고통받고 있다. 법정에서 무지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 재판관에게 법을 몰랐다고 말해도 어쨌든 벌을 받는다. 불법적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으면서 자기의 위반 행위에 대해 무지했다고 주장해도 벌을 받게 된다. 온 세상에 이 지식이 결여되어 있어서 끄리쉬나 의식을 가르칠 수천 명의 선생이 필요하다. 현재 이 지식의 필요성은 매우 크다. 끄리쉬나께서 인도에서 태어나셨으니까 바가바드 기따의 지식이 종파적이고 끄리쉬나가 종파적 신이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 바가바드 기따의 14장에서 앞서 지적했듯이, 스리 끄리쉬나께서는 당신을 모든 존재의 아버지라고 공표하신다(바가바드 기따 14.4).

개별 영혼은 절대 영혼의 부분이지만 이 물질계를 즐기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물질적 본성 안에 놓였다. 어떤 종류의 삶을 살든 끄리쉬나가 우리 모두의 아버지이다. 따라서 바가바드 기따는 어떤 특정한 단체나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이를 위한 것이다. 여기에는 동물들마저도 포함된다. 오늘날, 지고하신 아버지의 아들들이 무지 탓에 도둑질하고 있어 바가바드 기따에 정통한 자는 이 최고의 지식을 모든 존재에게 전해줄 의무가 있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자기들의 진정한 영적 본성과 최고의 영적 총체(끄리쉬나)와의 관계를 깨달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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