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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8장

끄리쉬나에 관한 지식으로 하는 행위

나 맘 까르마니 림빤띠 na māṁ karmāṇi limpanti
나 메 까르마-빨레 스쁘리하 na me karma-phale spṛhā
이띠 맘 요’ 비자나띠 iti māṁ yo 'bhijānāti
까르마비르 나 사 바댜떼 karmabhir na sa badhyate  

“어떤 것도 내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며 내가 행위의 결과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나에 관한 이 진리를 이해하는 자는 일의 결과에 따르는 과보에 얽히지 않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4.14》       

온 세상은 까르마에 속박된다. 1mm보다 더 작은 수백만의 미생물이나 균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브라흐마 삼히따는 인드라고빠(indragopa)라고 하는 미생물에서 시작하여 천국의 왕 인드라까지 모두 일의 과보인 까르마에 속박된다고 명시한다. 물질적 육신에 속박되어 있는 한 우리 모두 이런 과보들로 고통받거나 즐겨야 한다.

생명체가 고통과 즐거움을 겪을 물질적 육신은 자연이 마련해줬다. 다른 종류의 육신은 서로 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얻어진 것이다. 호랑이의 몸은 다른 동물을 죽이고 먹게끔 되어있다. 마찬가지로 돼지는 변을 먹게 되어있다. 그리고 사람의 치아는 채소와 과일을 먹게 되어있다. 이 모든 육신은 생명체가 전생에 한 행위에 따라 얻어진 것이다. 우리가 받을 다음 육신은 우리가 현재 하는 행위에 따라 마련되지만, 앞서 인용했듯이 스리 끄리쉬나께서 당신의 행위에 관한 초월적 본성을 아는 자는 행위의 과보에서 벗어난다고 알려주셨다. 우리가 하는 행위는 이 물질계에 더는 얽히지 않도록 하는 행위여야 한다. 이것은 끄리쉬나에 관해 공부하고, 당신의 행위에 관한 초월적 본성을 배우며 물질계와 영계(靈界)에서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시는지를 이해함으로써 끄리쉬나 의식이 되면 가능해진다.

끄리쉬나께서 이 지구에 오셨을 때 당신은 우리와 같지 않으셨다. 전적으로 초월적이셨다. 우리는 우리 행위에 대한 결실을 갈망하지만 끄리쉬나께서는 어떤 결실도 바라지 않으실 뿐더러 당신의 행위에 어떤 과보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은 결과 지향적인 어떤 행위를 갈망하지도 않으신다(나 메 까르마-빨레 스쁘리하: na me karma-phale spṛhā). 우리가 사업을 하면 이윤을 바라고 그 이윤으로 우리 삶을 더 즐길 수 있게 해 줄 각종 물품을 사기를 바란다. 속박된 영혼이 어떤 행위를 할 때마다 그 뒤에는 쾌락에 대한 욕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끄리쉬나께서는 아무 욕망도 없으시다. 당신은 최고 인격신이고 모든 것으로 충만하시다. 끄리쉬나께서 이 지구에 오셨을 때 여자 친구가 많았고, 16,000명이 넘는 부인도 있었기에 어떤 사람들은 그가 매우 호색가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우리는 끄리쉬나와의 관계가 뜻하는 바를 필히 이해해야 한다. 이 물질계에서 우리 역시 아버지, 어머니, 부인 혹은 남편이라는 많은 관계를 맺는다. 이곳에서 찾을 수 있는 관계가 무엇이든 지고의 신과 우리가 맺었던 관계의 그릇된 반영(反映)이다. 이 물질계에서 찾을 수 있는 어떤 관계든 절대 진리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이곳에서는 그릇되게 반영되었다. 우리가 끄리쉬나와 맺은 관계가 무엇이든 계속된다. 친구 관계를 맺었으면 그 우정은 영원하고 생을 거듭하여 계속된다. 물질계에서 우정은 몇 년 정도 유지되다 깨져버린다. 그러므로 그릇되고 일시적이며 실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가 끄리쉬나와 우정을 쌓으면 그것은 절대 깨지지 않을 것이다. 끄리쉬나를 우리 스승으로 삼으면 절대 기만당하지 않을 것이다. 끄리쉬나를 우리 자식으로 사랑하면 그는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끄리쉬나를 연인으로 사랑하면 그는 최고의 연인이 될 것이고 헤어짐은 없을 것이다. 끄리쉬나께서는 지고의 신이시므로 무한하며 무한한 수의 헌애자와 함께하신다. 어떤이는 그를 연인 혹은 남편으로서 사랑하려고 노력하고, 따라서 끄리쉬나께서 그 역할을 수락하신다. 우리가 끄리쉬나께 다가가는 어떤 방식이든, 당신께서 바가바드 기따에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를 받아 주신다.

예 야타 맘 쁘라빠댠떼 ye yathā māṁ prapadyante
땀스 따타이바 바자미 아함 tāṁs tathaiva bhajāmy aham
마마 바르뜨마누바르딴떼 mama vartmānuvartante
마누샤하 빠르타 사르바샤하 manuṣyāḥ pārtha sarvaśaḥ

“내게 항복하는 정도에 따라 나는 그에 상응하여 보답하느니라. 모든 면에서 모든 사람이 나의 길을 따르고 있다,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바가바드 기따 4.11》       

끄리쉬나의 고삐(gopīs), 즉 소치기 여자 친구들은 여러 전생에서 끄리쉬나를 남편으로 얻고자 숱한 고행을 감수했다. 마찬가지로 스리마드 바가바땀에서 슈까데바 고스와미(Śukadeva Gosvāmī)께서 끄리쉬나와 어울리며 놀던 소년들은 여러 전생에서 끄리쉬나를 동무로 얻기 위해 숱한 고행과 금욕을 참아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끄리쉬나의 동무와 동반자, 그리고 부인들은 평범한 생명체가 아니다. 우리가 끄리쉬나 의식에 관해 아무 이해가 없어서 끄리쉬나의 행위를 하찮은 행동으로 여기지만 실제로 당신의 행위는 숭고하다. 우리가 바라는 것의 모든 완성이 거기에 있다. 우리가 본래 품은 바람이 무엇이든 끄리쉬나 의식에 임했을 때 완벽하게 성취될 것이다.

끄리쉬나께서는 당신과 함께 놀 어떤 친구도 필요치 않으시며 단 한 명의 부인도 바라지 않으신다. 우리는 이루고 싶은 바람이 있어 부인을 한 명 두지만, 끄리쉬나께서는 스스로 완전하시다(뿌르남: pūrṇam). 가난한 자는 은행에 천만 원이 있으면 좋겠다고 바라지만 수십억 원을 가진 부자는 그런 바람이 없다. 끄리쉬나께서 최고 인격신이라면 왜 무언가를 바라야 하는가? 오히려 당신께서는 다른 이의 욕망을 이루어주신다. 인간이 제안하고 절대신께서 처리하신다. 만일 끄리쉬나께서 어떤 욕망을 갖고 계신다면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뜻이므로 그는 불완전한 존재일 것이다. 그러므로 끄리쉬나께서는 성취해야 할 어떤 욕망도 없다고 말씀하신다. 요게스바라(Yogeśvara), 즉 모든 요가의 스승으로서 당신이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 즉시 실현된다. 끄리쉬나께서는 당신의 헌애자들의 욕망을 그저 이루어 주시고자 남편 혹은 연인, 친구가 되신다. 끄리쉬나를 친구로, 스승으로, 아들이나 연인으로 받아들인다면 절망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끄리쉬나와 특정한 관계를 맺고 있지만 현재 이 관계는 가려졌다. 끄리쉬나 의식 안에서 발전을 이룸에 따라 이 관계는 드러날 것이다.

지고의 신은 스스로 충만하시고 해야 할 일이 없음에도 본보기를 확립하기 위해 일하신다. 당신의 행위는 물질계에 속박되지 않고, 이것을 이해한 자 또한 과보적 행위에서 벗어나게 된다.

에밤 갸뜨바 끄리땀 까르마 evaṁ jñātvā kṛtaṁ karma
뿌르바이 라삐 무묵슈비히 pūrvair api mumukṣubhiḥ
꾸루 까르마이바 따스맛 뜨밤 kuru karmaiva tasmāt tvaṁ
뿌르바이히 뿌르바따람 끄리땀 pūrvaiḥ pūrvataraṁ kṛtam

“아주 먼 옛날 해방된 영혼들은 내 초월적 본성에 대한 이 이해를 바탕으로 행동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 역시 그들의 발자취를 따라 네 의무를 수행하여라.” 《바가바드 기따 4.15》       

끄리쉬나 의식의 과정은 영적 삶에 성공한 위대한 아짜리아들(ācāryas)의 발자취를 따르는 것을 필요로 한다. 위대한 아짜리아, 성인, 헌애자, 그리고 생애를 통해 까르마 요가를 실천한 현명한 왕들이 세운 본보기를 따라 행동하면 우리도 해방하게 된다.

   꾸룩쉐뜨라(Kurukṣetra) 전장에서 아르주나는 전쟁에 가담하는 자기 행위가 과보를 낳게 될 것을 몹시 두려워했다. 그러므로 끄리쉬나께서는 당신을 위해 싸우면 과보에 얽힐 가능성은 없다고 확신시켜 주신다.

낌 까르마 낌 아까르메띠 kiṁ karma kim akarmeti
까바요’뺘뜨라 모히따하 kavayo 'py atra mohitāḥ
땃 떼 까르마 쁘라박샤미 tat te karma pravakṣyāmi
야 갸뜨바 목샤세’슈밧 yaj jñātvā mokṣyase 'śubhāt

“지성 있는 자들조차 무엇이 행위이며, 무엇이 무위(無爲)인지에 혼동하느니라. 이제 너에게 무엇이 행위인지를 설명할 터이니, 이를 알면 모든 불행에서 벗어나게 되리라.” 《바가바드 기따 4.16》       

사람들은 실제로 무엇이 일(까르마: karma)이고 무엇이 일이 아닌지(아까르마: akarma) 혼란스러워한다. 끄리쉬나께서 위대한 학자들(까바야하: kavayaḥ)조차도 일의 본성에 대해 혼란스러워한다고 여기서 지적하신다. 어떤 행위가 참되고 어떤 행위가 그렇지 않은지, 진정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 금지되었고 금지되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일의 원칙을 이해하면 물질적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은 필수적이고, 이렇게 하면 우리가 물질적 육신을 떠날 때 다른 몸을 더 받아야 할 필요가 없어지며 영적 하늘(spiritual sky)로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올바른 일의 원칙은 스리 끄리쉬나께서 제11장 마지막 구절에서 명백히 알려주신다.

맛-까르마-끄린 맛-빠라모 mat-karma-kṛn mat-paramo
마드-박따하 상가-바르지따하 mad-bhaktaḥ saṅga-varjitaḥ
니르바이라하 사르바-부떼슈 nirvairaḥ sarva-bhūteṣu
야하 사 맘 에띠 빤다바 yaḥ sa mām eti pāṇḍava

“소중한 아르주나여, 나를 향한 순수한 봉헌에 종사하며 이전에 한 행위들의 더러움과 관념적 추론에서 벗어나 모든 생명체에게 친절한 자는 반드시 나에게 오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11.55》       

이 한 구절이 바가바드 기따의 정수(精髓)를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반드시 “나(끄리쉬나)의 일”에 종사해야 한다. 그 일이란 무엇인가?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당신께 항복하라고 하신 바가바드 기따의 마지막 가르침 안에 드러나 있다(바가바드 기따 18.66).

아르주나의 예를 통해 끄리쉬나께서 허가하신 일만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인생의 사명이지만 우리는 이에 대해 알지 못한다. 육체적 혹은 물질적 개념의 삶에 얽매여 다양한 일에 종사하는 무지 탓에 이것을 알지 못한다. 끄리쉬나께서는 아르주나가 싸우길 원하셨고 비록 아르주나는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끄리쉬나께서 원하셨기 때문에 결국 싸웠다. 우리는 이 예를 따르도록 배워야 한다.

물론 끄리쉬나께서는 직접 아르주나에게 어떤 일을 하라고 말씀해 주셨지만 우리의 경우는 어떠한가? 스리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친히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지도하시는 데 반해, 우리 앞에는 친히 계시지 않다고 아무 지도 사항이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에게도 지도 사항은 있다. 바가바드 기따의 마지막 장에 우리가 해야 할 올바른 일에 관한 정보를 주셨다.

야 이담 빠라맘 구햠 ya idaṁ paramaṁ guhyaṁ
마드-박떼쉬 바비다샤띠 mad-bhakteṣv abhidhāsyati
박띰 마이 빠람 끄릿바 bhaktiṁ mayi parāṁ kṛtvā
맘 에바이샤띠 아삼샤야하 mām evaiṣyaty asaṁśayaḥ

나 짜 따스만 마누셰슈 na ca tasmān manuṣyeṣu
까스찐 메 쁘리야-끄릿따마하 kaścin me priya-kṛttamaḥ
바비따 나 짜 메 따스맏 bhavitā na ca me tasmād
안야하 쁘리야따로 부비 anyaḥ priyataro bhuvi

“최고의 비밀을 헌애자들에게 설명하는 자에게 봉헌은 보장되며 그들은 결국 나에게 올 것이다. 이 세상에서 그보다 더 소중한 종은 내게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니라.” 《바가바드 기따 18.68~69》       

그러므로 바가바드 기따를 전파하고 사람들을 끄리쉬나 의식이 되게 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다. 실제로 사람들은 끄리쉬나 의식이 없어 고통받고 있다. 우리 모두 전 세계를 위해 끄리쉬나의 과학을 널리 알리는 데 참여해야 한다. 짜이따냐 마하쁘라부께서는 끄리쉬나 의식을 가르치기 위해 오셨고 신분에 상관없이 끄리쉬나 의식을 가르치면 그 사람을 영적 스승으로 여겨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바가바드 기따와 스리마드 바가바땀 모두 끄리쉬나 의식이 되는 방법으로 가득 차 있다. 짜이따냐 마하쁘라부께서는 이 두 책을 선택하셨고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모든 마을과 동네에 이 끄리쉬나의 과학을 전파하라고 요청하셨다. 짜이따냐 마하쁘라부께서는 끄리쉬나 당신이셨고, 당신의 가르침을 끄리쉬나의 지시 사항으로 받아들이고 올바른 임무에 종사해야 한다. 그러나 바가바드 기따를 개인적 해석이나 동기 없이 있는 그대로 전하도록 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바가바드 기따에 자신의 해석을 더해 설명하지만 우리는 스리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신 단어 하나하나 있는 그대로 제시해야 한다.

끄리쉬나를 위해 일하는 자는 물질계의 다른 사람들이 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보일지라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아르주나가 평범한 전사처럼 싸웠을지라도 끄리쉬나 의식으로 싸웠기 때문에 그가 한 행위의 얽힘에서 벗어났다. 이런 식으로 그의 행위가 물질적으로 보일지라도 전혀 물질적인 것이 아니었다. 끄리쉬나께서 허가하신 어떤 행위라도 그게 무엇이든 상관없이 과보는 없다. 싸움이 전혀 좋은 일이 아닐지라도 가끔은, 꾸룩쉐뜨라 전투처럼 절대적으로 필요한 때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매우 이타적이며 인도주의적인 행위를 할지라도 여전히 물질적 행위에 속박된다. 그러므로 행위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위를 할 때의 의식이 중요하다.

까르마노 히 아삐 볻다뱜 karmaṇo hy api boddhavyaṁ
볻다뱜 짜 비까르마나하 boddhavyaṁ ca vikarmaṇaḥ
아까르마나스 짜 볻다뱜 akarmaṇaś ca boddhavyaṁ
가하나 까르마노 가띠히 gahanā karmaṇo gatiḥ

“행위의 미묘함을 이해하기란 몹시 어렵다. 그러므로 행위가 무엇인지, 금지된 행위가 무엇인지, 그리고 무위가 무엇인지 올바로 알아야 한다.” 《바가바드 기따 4.17》       

까르마의 경로는 매우 복잡하다. 그러므로 까르마(karma)와 아까르마(akarma), 비까르마(vikarma)의 차이에 관해 이해해야 한다. 끄리쉬나 의식에 임하기만 하면 이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얽매이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의 구분을 반드시 해야 할 것이다. 일상적인 삶 속에서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 어떤 법을 어기고 결국 고통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연의 법은 매우 엄격하고 가혹해 어떤 변명도 허용하지 않는다. 아무리 아이가 무지하고 순진한 탓에 불을 만져도 화상을 입게 되는 것이 자연의 법이다. 따라서 가혹한 자연의 법이 우리를 고통으로 속박하지 않도록 우리의 행동 방향을 매우 조심스럽게 선택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행위를 해야 하고 어떤 행위를 피해야 하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까르마라는 단어는 규정된 의무를 의미한다. 비까르마는 규정된 의무에 반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아까르마는 과보가 전혀 없는 행위를 의미한다. 아까르마의 행위를 할 때 과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 끄리쉬나의 지시대로 행동할 때가 바로 그러한데, 거기에는 어떤 과보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자발적으로 누군가를 죽이면 국법에 따라 사형이나 종신형에 처해진다. 이런 행위는 규정된 행위에 반하므로 비까르마라 불린다. 그러나 만일 국가가 우리를 군대에 징병하여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면 과보로 고통받지 않고 이것을 아까르마라고 한다. 한 경우는 자기 일시적인 기분에 따라 한 행동이고, 다른 경우는 국가의 지시에 따라 한 행동이다. 마찬가지로, 끄리쉬나의 지시대로 행동할 때 그런 행위는 아무 과보도 남기지 않으므로 아까르마라고 한다.

까르마니 아까르마 야하 빠쉐드 karmaṇy akarma yaḥ paśyed
아까르마니 짜 까르마 야하 akarmaṇi ca karma yaḥ
사 붓디만 마누쉐슈 sa buddhimān manuṣyeṣu
사 육따하 끄릿스나-까르마-끄릿 sa yuktaḥ kṛtsna-karma-kṛt

“행위 속에서 무위를 보고 무위 속의 행위를 보는 자는 사람들 안에서 지성 있는 자이고, 그가 어떤 행위를 하더라도 초월적 위치에 있는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 4.18》       

이것을 실제로 이해한 자는 행위를 해도 그 행위에 어떤 과보도 없으며, 아까르마의 본성을 이해한 자는 실제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아까르마니(akarmaṇi)라는 단어는 까르마의 과보를 피하려고 노력하는 자를 일컫는다. 자기 행위를 끄리쉬나 의식과 긴밀히 연결 지음으로써 어떤 행위를 할지라도 그는 자유롭다. 꾸룩쉐뜨라 전장에서 아르주나는 싸움에 임했고 두료다나 편 또한 싸움에 임했다. 아르주나는 과보에서 벗어나지만 두료다나는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외적으로는 양 진영 모두 싸움에 임하고 있지만 아르주나는 끄리쉬나의 명령에 따라 싸우고 있으므로 과보에 구속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누군가가 끄리쉬나 의식 안에서 일하는 것을 보면 그의 행위는 어떤 과보도 초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그런 행위를 이해하면 매우 현명하다고 여겨진다(사 붓디만).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보는 것보다 왜 하는지를 이해하는 기술이 필요하다.

사실 아르주나는 전장에서 몹시 불쾌한 행위에 임하고 있지만 그가 끄리쉬나 의식 안에 있으므로 과보로 고통받지 않았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아주 좋은 어떤 행위를 할지라도 끄리쉬나 의식 안에서 실천하지 않으면 과보로 고통받아야 한다. 물질적 관점에서 싸우지 않겠다는 아르주나의 첫 결심은 훌륭한 것이었으나 영적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경건한 행위를 하면 특정한 결과를 얻게 된다. 매우 훌륭한 가문이나 브라흐마나 혹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아주 부유하거나 학식이 매우 높거나 혹은 무척 아름다울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불경한 행위를 하면 낮은 신분의 가정이나 혹은 동물 가족 안에서 태어나거나 문맹이나 바보 혹은 몹시 추한 모습이 된다. 비록 아주 경건한 행위를 하여 좋은 출생을 하게 되더라도 여전히 행위와 과보라는 가혹한 법칙에 속박된다. 우리의 주목적은 이 물질계에서 탈출하는 것이어야 한다. 만일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귀족 가문이나 부유한 가족, 혹은 고학력이나 아름다운 몸에 사로잡히게 될 것이다. 물질적 삶을 위한 이런 편의를 모두 소유하고 있더라도 생로병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해하는 단계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경계하도록 스리 끄리쉬나께서 바가바드 기따에서 다음과 같이 경고하신다.

아-브라흐마-부바날 로까하 ābrahma-bhuvanāl lokāḥ
뿌나르 아바르띠노’르주나 punar āvartino 'rjuna
맘 우뻬땨 뚜 까운떼야 mām upetya tu kaunteya
뿌나르 잔마 나 비댜떼 punar janma na vidyate

“물질계의 가장 높은 행성에서 가장 낮은 행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곳은 생사가 반복되는 고통스런 곳이다. 그러나 나의 보금자리에 이르는 자는, 오 꾼띠의 아들이여, 두 번 다시 태어나지 않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4.16》       

물질적 우주에서 가장 높은 행성인 브라흐마로까에조차 생사의 반복이 존재한다. 이것에서 벗어나려면 끄리쉬나의 행성에 반드시 가야 한다. 아주 부유하거나 아름다운 사람이 되면 무척 좋을지도 모르나 그렇게 얼마나 오래 머물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의 영원한 삶이 아니다. 지적이고, 부유하고 아름답게 50년, 60년 혹은 최대 100년을 산다고 해도 진정한 삶은 50년 혹은 100년, 1000년 심지어 100만 년도 아니다. 우리는 영원한 존재이고, 이 영원한 삶을 얻어야 한다. 그것을 얻지 않은 것이 우리가 직면한 총체적 문제다. 그 문제는 끄리쉬나 의식일 때 해결될 수 있다.

우리가 이 물질계를 떠날 때 끄리쉬나 의식에 있으면 물질계로 더 되돌아오지 않아도 된다. 요점은 이 물질적 존재를 완전히 벗어나는 데 있다. 물질계에서의 우리 상황을 향상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감옥에서 죄수가 일급 죄수가 되려고 자기 상황을 향상하려고 노력하면 결국 국가에서 그에게 최고 지위를 줄지도 모르나 어떤 올바른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도 특급 죄수가 되어 만족하지는 않을 것이다. 감옥에서 완전히 나가는 것을 바라야 한다. 물질계에서 우리 중 누구는 일류, 이류, 혹은 삼류 죄수이지만, 어쨌든 우리는 모두 죄수다. 진정한 지식은 그저 석사나 박사 학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이런 기본 문제를 이해하는 데 있다.

야사 사르베 사마람바하 yasya sarve samārambhāḥ
까르마-상깔빠-바르지따하 kāma-saṅkalpa-varjitāḥ
갸나그니-닥다-까르마남 jñānāgni-dagdha-karmāṇaṁ
땀 아후 빤디땀 부다하 tam āhuḥ paṇḍitaṁ budhaḥ

“감각 만족을 향한 욕망 없이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자를 두고 완전한 지식을 갖춘 자라고 한다. 성자들이 말하기를, 이런 사람은 완벽한 지식의 불꽃으로 모든 일의 과보를 완전히 태워 없애버린 행위자라 하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4.19》       

빤디땀(paṇḍitam)이란 단어는 배웠다는 것을 의미하고, 부다하(budhāḥ)는 정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10장에서 부다 바바-사만비따하(budhā bhāva-samanvitāḥ)라는 절에서도 부다하를 찾을 수 있다(바가바드 기따 10.8). 바가바드 기따에 따르면 대학교에서 많은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배운 자가 아니다. 바가바드 기따는 배운 자는 모든 것을 동등하게 볼 수 있는 자라고 한다.

비댜-비나야-삼빤네 vidyā-vinaya-sampanne
브라흐마네 가비 하스띠니 brāhmaṇe gavi hastini
슈니 짜이바 스바-빠께 짜 śuni caiva śva-pāke ca
빤디따하 사마-다르시나하 paṇḍitāḥ sama-darśinaḥ

“겸허한 성인들은 진정한 지식의 힘으로 학식과 교양이 있는 브라흐마나, 소, 코끼리, 개 그리고 개를 먹는 자(카스트 밖의 사람들)를 차별 없이 같은 눈으로 보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5.18》       

인도에서는 베다 문명에 따라 지식을 갖춘 브라흐마나를 인류 중 가장 높은 인간으로 여긴다. 지식을 갖춘 온화한 빤디따(paṇḍita)는 그런 브라흐마나와 개 혹은 카스트 밖에 있는 개 먹는 자들을 같은 눈으로 본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가장 높고 가장 낮은 것에 구별을 두지 않는다. 학식을 갖춘 브라흐마나가 개보다 못하단 말인가? 그렇지 않다. 그러나 빤디따는 피부를 보지 않고 영혼을 보므로 그들을 모두 똑같이 본다. 모든 생명체 안에 깃든 똑같은 영혼을 보는 법을 배운 자는 빤디따로 간주하는데, 실제로 모든 생명체는 완전한 총체 영혼(절대신)의 부분인 영적 불꽃이기 때문이다. 영적 불꽃은 모두 같지만 다른 옷으로 덮여있을 뿐이다.  명예로운 자가 아주 남루한 옷을 입고 왔을지라도 그가 불명예스러워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이 물질적 육신은 영혼이 입고 있는 옷과 같다고 한다.

바삼시 지르나니 야타 비하야 vāsāṁsi jīrṇāni yathā vihāya
나바니 그리흐나띠 나로’빠라니 navāni gṛhṇāti naro parāṇi
따타 샤리라니 비하야 지르나니 tathā śarīrāṇi vihāya jīrṇāny
아냐니 삼야띠 나바니 데히 anyāni saṁyāti navāni dehī

“헌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입듯이 영혼은 늙고 쓸모없는 육신을 버리고 새로운 육신을 얻는다.”《바가바드 기따 2.22》        

어떤 생명체를 볼 때마다 “여기에 영혼이 있다.”라고 생각해야 한다. 삶을 사는 데 있어 이런 영적 시각을 가진 누구라도 빤디따(paṇḍita)이다. 짜나꺄 빤디따(Cāṇakya Paṇḍita)는 교육의 기준, 즉 빤디따가 될 자격이 될 기준을 이렇게 삼았다. “학식 있는 자는 자기 아내를 제외한 모든 여성을 어머니로 여겨야 한다. 그는 모든 물질적 소유를 길에 나뒹구는 쓰레기로 보고, 다른 이의 고통을 자기 고통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한다.” 부처님은 말이나 행동으로 동물조차 해치면 안 된다고 가르치셨다. 이것이 빤디따의 자격이고 이것이 삶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자기 삶과 행동이 자기가 지닌 삶에 대한 통찰력과 일치할 때 교육받은 자라고 여겨야지, 그 사람의 학위에 따라 교육받은 자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가바드 기따에서 말하는 빤디따의 의미다. 마찬가지로 부다하(budhāḥ)란 단어는 특정적으로 경전에 정통한 자를 일컫는다. 그런 깨달음과 경전 학습의 결과는 바가바드 기따에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아함 사르바샤 쁘라빠보 ahaṁ sarvasya prabhavo
맛따하 사르밤 쁘라바르따떼 mattaḥ sarvaṁ pravartate
이띠 마뜨바 바잔떼 맘 iti matvā bhajante māṁ
부다 바바-사만비따하 budhā bhāva-samanvitāḥ

“내가 영계와 물질계 모두의 근원이니라. 모든 것은 나에게서 나왔다. 이것을 완벽히 아는 자는 나를 향한 봉헌에 종사하고 마음을 다해 나를 숭배하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10.8》        

경전에 정통한 사람 혹은 부다하는 끄리쉬나가 모든 발산물의 기원이라는 사실을 이해한 자이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은 끄리쉬나의 발산물이다. 수백 수천만 년 동안 햇볕이 태양에서 발산되었지만 태양은 그대로이다. 마찬가지로 모든 물질적, 영적 에너지는 끄리쉬나에게서 나왔다. 이것을 알게 되면 끄리쉬나의 헌애자가 된다.

따라서 끄리쉬나 의식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아는 자는 이 물질계를 즐기려고 더는 욕망하지 않고, 이런 자가 실제로 학식을 갖춘 자다. 모두 강한 열망(까마: kāma)으로 물질계에서 행동하지만 현명한 자는 이 욕망의 명령에서 자유롭다(까마-상깔빠-바르지따하: kāma-saṅkalpa-varjitāḥ).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갸나그니-닥다-까르마남(Jñānāgni-dagdha-karmāṇam). 지식의 불이 모든 죄 많은 행위의 과보를 태워버린다. 이것이 가장 강력한 정화제이다. 끄리쉬나 의식이라는 이 초월적 지식, 모든 지식의 왕인 라쟈-비댜를 구하려 노력하는 한 우리 삶은 의미와 방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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