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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우주를 넘어서는 하늘

더 높은 행성에조차 생사가 존재하는데 왜 위대한 요가행자들은 그런 곳으로 올라가고 싶어하는가? 그들은 여러 신비한 능력을 지녔지만 여전히 물질적 삶의 편의를 즐기려 하는 경향이 있다. 더 높은 행성에서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오래 살 수 있다. 스리 끄리쉬나께서는 이런 행성들의 시간 계산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사하스라-유가-빠르얀땀 sahasra-yuga-paryantam
아하르 야드 브라흐마노 비두후 ahar yad brahmaṇo viduḥ
라뜨림 유가-사하스란땀 rātriṁ yuga-sahasrāntāṁ
떼 '호-라뜨라-비도 자나하 te 'ho-rātra-vido janāḥ

“인간의 계산 방법으로 브라흐마(Brahmā)의 하루는 네 유가(yuga)를 천 번 거치는 것이니라. 그리고 그의 밤의 길이 역시 이와 같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8.17》

한 유가(yuga)는 430만 년에 해당한다. 이 숫자에 천을 곱하면 브라흐마로까 행성에 거주하는 브라흐마의 12시간이 된다. 마찬가지로 나머지 12시간은 밤이다. 그런 30일이 한 달이고 12개월이 1년이며 브라흐마는 그런 계산법에 해당하는 100년을 산다. 그런 행성에서의 수명은 정말 길지만 무수한 해가 흐른 후에 브라흐마로까의 거주자들 역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영적 행성으로 가지 않는 한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아뱍딷 뱍따야 사르바하 avyaktād vyaktayaḥ sarvāḥ
쁘라바반띠 아하르-아가메 prabhavanty ahar-āgame
라뜨리-아가메 쁘랄리얀떼 rātry-āgame pralīyante
따뜨라이바뱍따-상갸께 tatraivāvyakta-saṁjñake

“브라흐마의 하루가 시작될 때 많은 생명체는 발현하게 되고 밤이 오면 모두 전멸하게 된다.” 《바가바드 기따 8.18》

브라흐마의 하루가 끝날 때 낮은 곳에 위치하는 모든 행성은 물로 뒤덮이게 되고 거기에 사는 생명체는 전멸하게 된다. 이런 황폐와 밤이 지나간 후 아침이 되면 브라흐마가 일어나고 다시 창조가 시작되며 생명체도 밖으로 나온다. 그러므로 창조와 파괴에 좌우되는 것이 물질계의 본성이다.

부따-그라마하 사 에바얌 bhūta-grāmaḥ sa evāyaṁ
부뜨바 부뜨바 쁘랄리야떼 bhūtvā bhūtvā pralīyate
라뜨리-아가메-‘바샤하 빠르타 rātry-āgame 'vaśaḥ pārtha
쁘라바바띠 아하르-아가메 prabhavaty ahar-āgame

“다시 또다시 브라흐마의 낮이 되면 많은 생명체는 존재의 세계로 나오고, 브라흐마의 밤이 되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소멸의 세계로 들어간다.”《바가바드 기따 8.19》

생명체는 황폐한 상태를 좋아하지 않지만 브라흐마의 밤 동안 행성에 있는 생명체들이 모두 물에 흡수될 때까지 황폐화는 계속되고 행성들은 물에 잠긴다. 하지만 하루가 시작되면 물이 점차 사라지게 된다.

빠라스 따스맛 뚜 바보 '뇨 paras tasmāt tu bhāvo 'nyo
‘뱍또 ‘뱍땃 사나따나하 'vyakto 'vyaktāt sanātanaḥ
야 사 사르베슈 부떼슈 yaḥ sa sarveṣu bhūteṣu
나샷수 나 비나샤띠 naśyatsu na vinaśyati

“그런데 또 다른 본성이 있어 이것은 영원하고 발현과 비발현의 상태를 초월한다. 이것은 최상이고 절대 소멸하지 않는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멸할 때 그 부분만은 있는 그대로 남는다.” 《바가바드 기따 8.20》

우리는 물질계의 크기를 가늠할 수 없지만 베다 정보에 따르면 전 창조 안에는 수백 만의 우주가 있고 이 물질적 우주를 초월한 곳에 또 다른 창공이 있으며 그곳은 영적이다. 거기에 있는 행성들은 모두 영원하고 그곳 생명체들 또한 영원하다. 이 절에서 바바하(bhāvaḥ)라는 단어는 ‘본성’을 의미하고 여기에 또 다른 본성이 나타난다.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두 가지 본성을 경험한다. 생명체는 영혼이고 영혼이 생명체 안에 있는 한 주체는 움직이지만 영적 불꽃이 몸에서 나가는 즉시 몸은 움직이지 않는다. 영적인 본성을 끄리쉬나의 상위 본성이라 하고 물질적 본성을 하위 본성이라 한다. 이 물질적 본성을 넘어서면 완전히 영적인 상위의 본성이 있다. 경험적인 지식으로 이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 망원경으로 무수한 별을 볼 수 있지만 그곳에 갈 수는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물질적 우주조차 경험적인 지식으로 이해할 수 없다면 절대신과 그의 왕국에 대해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실험과 경험으로는 불가능하다.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실험적 지식으로는 알 수 없다. 어머니에게서 들어야 하고 어머니 말을 믿어야 한다. 만일 어머니를 믿지 않는다면 아버지를 알 방법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끄리쉬나 의식을 고수한다면 끄리쉬나와 그의 왕국에 대한 모든 정보는 밝혀질 것이다.

빠라스뚜 바바하(Paras tu bhāvaḥ)는 “상위 본성”을 의미하고 뱍따하(vyaktaḥ)는 우리가 보는 발현된 것을 뜻한다. 물질적 우주는 지구, 태양, 별, 그리고 행성들을 통해 나타난다. 그리고 이 우주를 넘어서 또 다른 본성이 있으며 영적이다. 아뱍땃 사나따나하. 물질적 본성은 시작과 끝이 있지만 영적 본성은 사나따나하, 즉 영원하다. 시작과 끝도 없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구름이 지나가며 하늘을 가리게 되고 멀리서 보면 하늘을 뒤덮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하늘 전체의 아주 미미한 부분만을 가렸을 뿐이다. 우리가 매우 작아서 몇백 마일만 가려도 하늘 전체가 구름에 뒤덮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모든 물질적 우주는 거대한 영적 창공에 있는 아주 작고 하찮은 구름에 불과하다. 물질계는 마핫-땃뜨바(mahat-tattva)라고 하는 물질에 둘러싸여 있다. 구름이 시작과 끝이 있는 것처럼 물질적 본성도 시작과 끝이 있다. 구름이 걷히고 날이 개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육신은 영혼을 지나가는 구름과도 같다. 얼마간 머물다가 부산물을 만들고 쇠퇴하다 사라진다. 우리가 목격하는 어떤 물질적 현상도 탄생과 성장, 얼마간의 머뭄, 부산물의 생산, 쇠퇴, 소멸이라는 이 여섯 가지 형태를 겪게 되어 있다. 끄리쉬나께서는 이런 구름의 본성과 같은 변화를 넘어서는 영적 본성이 있고 이것은 영구하다고 하신다. 그뿐만 아니라 이 물질적 본성이 소멸할 때 아뱍땃 사나따나하는 그대로 남는다.

베다 문헌에는 물질계와 영계에 관한 방대한 양의 정보가 들어있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의 제2권에는 영적 창공과 그곳 거주자들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거기에는 영적 비행기라는 것도 있어 해방된 존재들이 그것을 타고 번개와 같이 여행한다는 정보까지도 적혀 있다. 우리가 여기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이 실제로 그곳에도 존재한다. 이곳 물질적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것들은 영적 하늘에 존재하는 것들의 모방이고 그림자이다. 영화관에서 그저 현실의 모사나 쇼를 보는 것처럼 물질계는 실제를 모형으로 한 대상들의 조합일 뿐이라고 스리마드 바가바땀은 말한다. 진열장에 있는 여자 마네킹이 여자를 모형으로 한 것처럼 말이다. 정신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모두 이 마네킹이 모형이라고 안다. 스리다라 스와미(Śrīdhara Svāmī)는 영계가 실제이고 모사품인 이 물질계는 실제처럼 보인다고 한다. 실제의 의미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실제란 정복될 수 없는 존재이며 영원함을 뜻한다.

나사또 비댜떼 바보 nāsato vidyate bhāvo
나바보 비댜떼 사따하 nābhāvo vidyate sataḥ
우바요르 아삐 드리쉬똔따스 ubhayor api dṛṣṭo 'ntas
뜨바나요스 땃뜨바-다르시비히 tv anayos tattva-darśibhiḥ

“진리를 꿰뚫어 보는 사람들은 영원하지 않은 것(육신)은 영구성이 없고 영원한 것(영혼)은 멈춤이 없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이 둘의 본성을 통찰함으로써 이러한 결론을 내린 것이다. 《바가바드 기따 2.16》

진정한 즐거움은 끄리쉬나인 반면, 물질적 즐거움은 일시적이고 진짜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는 자들은 그림자의 즐거움에 관여하지 않는다. 인생의 진정한 목표는 영적 하늘을 구하는 것이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이것을 알지 못한다고 스리마드 바가바땀은 지적한다. 인간 삶은 실제를 이해하고 그곳으로 이동하기 위함을 의미한다. 모든 베다 문헌들은 이 어둠 속에 남아 있지 말 것을 가르친다. 물질계의 본성은 어둠이지만 영계는 빛으로 가득하고 이 빛은 불이나 전기의 도움 없이 스스로 빛난다. 끄리쉬나께서 바가바드 기따 15장을 통해 힌트를 주신다. 《바가바드 기따 2.16》

나 딷 바사야떼 수르요 na tad bhāsayate sūryo
나 샤샹꼬 나 빠바까하 na śaśāṅko na pāvakaḥ
얃 가뜨바 나 니바르딴떼 yad gatvā na nivartante
딷 다마 빠라맘 마마 tad dhāma paramaṁ mama

“지고한 내 왕국은 태양이나 달, 불이나 전기 없이 빛나느니라. 그곳에 도달한 자는 단연코 이 물질계에 되돌아오지 않는다.”

영적 세계를 발현되지 않은 곳이라고 하는 이유는 물질적인 감각으로 인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뱍또 ‘끄샤라 이띠 욱따스 avyakto 'kṣara ity uktas
땀 아후후 빠라맘 가띰 tam āhuḥ paramāṁ gatim
얌 쁘라뺘 나 니바르딴떼 yaṁ prāpya na nivartante
딷 다마 빠라맘 마마 tad dhāma paramaṁ mama

“그 최상의 보금자리는 발현하지 않았고 결코 틀리지 않으며 최상의 목적지이다. 그곳에 도달하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바로 그곳이 내 최상의 보금자리이니라.” 《바가바드 기따 8.21》

위대한 여정이 이 절에 설명되어 있다. 외부 공간을 통과하고 물질적 우주를 횡단하여 그 표면을 뚫고 영적 하늘에 들어가야 한다. 빠라맘 가띰, 그 여정은 최상의 여정이다. 지구에서 몇천 마일을 갔다가 다시 돌아올 이유가 없다. 그런 여정은 별로 영웅적이지 못하다. 우리는 물질적 우주 전체를 뚫고 나가야 한다. 이것은 우주선이 아니라 끄리쉬나 의식으로 가능하다. 끄리쉬나 의식에 몰입해 있고 죽음의 순간 끄리쉬나를 생각하는 자는 즉시 그곳으로 옮겨진다. 영적 하늘에 가서 행복과 지식으로 가득 찬 영원한 삶을 살기를 조금이라도 바란다면 지금부터 삿-칫-아난다 몸을 계발하기 시작해야 한다.  끄리쉬나는 삿-칫-아난다 몸을 가지고 계시다. 이스바라 빠라마하 끄리쉬나 삿-칫-아난다-비그라하(īśvaraḥ paramaḥ kṛṣṇaḥ sac-cid-ānanda-vigrahaḥ), 그리고 우리 또한 당신과 비슷한 영원함과 지식, 행복으로 가득 찬 몸을 지니고 있지만 우리 몸은 아주 작고 물질이란 옷으로 덮여 있다. 어떻게 해서든 이 가짜 옷을 버릴 수 있다면 영적 왕국에 도달할 수 있다. 그 영적 세계를 얻는다면 돌아올 필요가 없다(얌 쁘라뺘 나 니바르딴떼).

모두가 그 ‘다마  빠라맘’, 즉 끄리쉬나가 계신 최상의 보금자리로 가려고 노력해야 한다. 끄리쉬나 당신이 우리에게 직접 오셔서 지침서로 삼을 베다 지식을 주셨고 당신의 진실한 대표자들도 보내주셨다. 인간에게 주어진 이 편의를 잘 활용해야 한다. 그 최상의 보금자리에 도달한 자들에게 참회와 고행, 명상 등의 과정은 더는 필요치 않고, 그곳에 도달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모든 종류의 참회와 고행은 불필요한 시간 낭비가 된다. 인간 형태의 삶은 이 혜택을 얻는 계기이고, 인간으로 태어난 자들에게 이 삶의 완성을 이루게 하는 것이 국가와 부모, 선생, 보호자들의 의무이다. 개와 고양이처럼 단순히 먹고 자고 성교하고 다투는 것이 문명이 아니다. 이 인간 형태의 삶을 올바로 활용해야 하고 이 지식을 이용해 끄리쉬나 의식이 되도록 준비해야 한다. 그 결과 하루 24시간 끄리쉬나에 몰입하게 되고 죽음의 순간 즉시 영적 하늘로 옮겨질 수 있다.

뿌루샤하 사 빠라하 빠르타 puruṣaḥ sa paraḥ pārtha
박땨 라뱌스 뜨바난야야 bhaktyā labhyas tv ananyayā
야샨따하-스타니 부따니 yasyāntaḥ-sthāni bhūtāni
예나 사르밤 이땀 따땀 yena sarvam idaṁ tatam

“모든 것보다 위대한 최고인격신은 진실한 헌애로 얻을 수 있다. 그는 자기 보금자리에 있지만 모든 곳에 두루 있고, 그 안에 모든 것이 있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8.22》

그 최상의 보금자리에 이르는 데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여기에 명시되어 있듯이 그곳에 이르는 과정은 박띠(bhakti)이다. ‘박땨(Bhaktyā)’는 봉헌과 지고한 주에 대한 항복을 의미한다. 박땨의 어원은 ‘바즈(bhaj)’로 봉사를 의미한다. 나라다-빤짜라뜨라(Nārada Pañcarātra)가 제시하는 박띠의 정의는 “명칭에서 벗어남”이다. 육신 때문에 생겨나고 육신이 바뀔 때마다 항상 변하는 이 명칭들, 순수한 영혼에 부수되는 이 모든 명칭에서 벗어날 결심을 한 사람은 박띠를 이룰 수 있다. 박띠는 우리가 순수한 영혼이며 전혀 물질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다. 우리의 진정한 자아는 그저 영혼을 감싸고 있는 이 육신이 아니라 다사(dāsa), 즉 끄리쉬나의 종이다. 진정한 자아의 상태에서 끄리쉬나를 섬기는 자가 박따(bhakta)이다. 흐리쉬께나 흐리쉬께샤 세바남(Hṛṣīkeṇa hṛṣīkeśa-sevanam). 우리의 감각이 물질적 명칭에서 벗어날 때 그 감각을 감각의 주인 흐리쉬께샤, 곧 끄리쉬나를 섬기는 데 활용할 수 있다.

루빠 고스와미께서 지적하셨듯이 끄리쉬나를 호의적으로 섬겨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물질적인 목적이나 이득을 위해 신을 섬긴다. 물론 물질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신께 가는 자가 아예 가지 않는 자들보다 낫지만 물질적인 혜택을 바라지 않고 절대신을 섬겨야 한다. 물론 끄리쉬나는 무한하고 당신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바가바드 기따가 특정적으로 현존한다.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 지식을 얻고 무엇이 끄리쉬나를 기쁘게 하는지 알고 당신이 즐거우시도록 호의적으로 봉헌해야 한다. 끄리쉬나 의식은 방대한 문헌을 지닌 위대한 과학으로 이것을 활용하여 박띠를 이뤄야 한다.

뿌루샤 사 빠라하. 영적 하늘에는 절대신이 지고한 인간으로 계신다. 그곳에는 스스로 빛나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행성이 있고 각 행성은 끄리쉬나가 거처하는 곳의 확장이다. 끄리쉬나는 네 팔을 하고 계시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름이 있다. 그 모두는 사람이지 비인성적 존재가 아니다. 이 뿌루샤들(puruṣas), 즉 인격에게 다가가는 방법은 도전이나 철학적 추측 혹은 관념적 제조나 체조를  통해서가 아니라 결과에 얽매이는 행위를 하지 않는 박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뿌루샤하, 최고의 인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야샨따하스타니 부따니 예나 사르밤 이담 따땀. 모든 생명체와 모든 것이 당신 안에 있지만 당신은 그들 밖에 있고 모든 곳에 편만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그는 마치 태양과 흡사하다. 태양은 한곳에 있지만 빛을 통해 모든 곳에 존재한다. 절대신은 당신의 다마 빠라맘에 거처하시지만 당신의 에너지는 모든 곳에 퍼져있다. 태양과 태양광선이 다르지 않듯이 당신과 당신의 에너지 또한 다르지 않다. 끄리쉬나의 에너지와 끄리쉬나가 다르지 않으므로 우리가 봉헌에 앞서게 되면 모든 곳에서 끄리쉬나를 볼 수 있다.

 쁘레만자나-추리따-박띠-빌로짜네나 premāñjana-cchurita-bhakti-vilocanena
산따 사다이바 흐리다예슈 빌로까얀띠 santaḥ sadaiva hṛdayeṣu vilokayanti

“저는 원초적 최고인격신 고빈다를 숭배합니다. 신성(神性)을 향한 사랑의 연고가 눈에 발린 순수한 헌애자들은 그들의 가슴 속에서 언제나 당신을 봅니다.” 《브라흐마 삼히따 5.38》

절대신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 찬 자들은 그들 앞에 계시는 절대신을 끊임없이 본다. 어젯밤에는 봤지만 오늘은 다시 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들에게 끄리쉬나는 항상 존재하고 끊임없이 인지될 수 있다. 우리는 그저 당신을 볼 수 있는 눈을 발전시켜야 할 뿐이다.

물질적 감각으로 뒤덮인 물질적 속박 때문에 무엇이 영적인지 이해할 수 없게 되었지만 이런 무지는 하레 끄리쉬나를 구송함으로 제거될 수 있다. 어째서 그러한가? 잠에 빠져든 자는 소리 진동으로 깨어난다. 억지로 또는 고의적으로 보지 않고 느끼지 않고 냄새를 맡지 않을 수는 있지만 청각은 너무나 두드러져 잠자는 자도 그저 소리의 진동으로 깨어날 수 있다. 마찬가지로 물질적 접촉으로 현재 너무나 강력한 수면 상태에 들어가 있다고 해도 ‘하레 끄리쉬나, 하레 끄리쉬나, 끄리쉬나 끄리쉬나, 하레 하레 /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라는 이 초월적인 소리 진동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 하레 끄리쉬나는 절대신과 당신의 에너지를 부르는 말이다. 하레는 에너지를, 끄리쉬나는 절대신을 의미하므로 우리가 하레 끄리쉬나를 구송함은 “오, 절대신의 에너지시여, 오 절대신이시여, 제발 저를 받아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 외에 절대신께서 받아주실 다른 기도는 없다. 매일의 양식이 있음에도 양식을 달라고 기도할 이유 또한 없다. 하레 끄리쉬나는 절대신을 부르며 당신이 우리를 받아들여 주시기를 바라는 부탁이다. 주 짜이따냐 마하쁘라부 당신 스스로 이렇게 기도하셨다.

아이 난다-따누자 낀까람 ayi nanda-tanuja kiṅkaraṁ
빠띠땀 맘 비샤메 바밤부다우 patitaṁ māṁ viṣame bhavāmbudhau
끄리빠야 따바 빠다-빤까자- kṛpayā tava pāda-paṅkaja-
스티따-둘리-사드리샴 비찐따야 sthita-dhūlī-sadṛśaṁ vicintaya

“난다 마하라자의 아들이시여, 저는 당신의 영원한 종이지만 어떤 연유로 생과 사라는 바다에 빠졌습니다. 그러니 이 죽음의 바다에서 저를 건져내시어 당신의 연꽃 같은 발에 작은 티끌로 붙여두소서.” 《식샤쉬따까 5》.

바다에 빠진 자에게 남은 단 하나의 희망은 누군가가 와서 건져내 주는 것이다. 만일 누군가가 와서 몇 발자국만 물 밖으로 끌어내 주어도 즉시 구제된다. 마찬가지로 이 삶과 죽음의 바다에서 끄리쉬나 의식의 과정을 통해 끌어올려 지면 그 즉시 구제된다.

비록 절대신의 초월적 본성과 이름, 명성, 활약을 인지할 수 없지만 끄리쉬나 의식을 확립하면 점차 절대신이 우리 앞에 당신을 드러내실 것이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절대신을 볼 수 없지만 자격을 갖추면 절대신께서 당신을 드러내 주실 것이고 그러면 당신을 볼 수 있게 된다. 그 누구도 절대신께 자기 앞에 나타나 춤추라고 명령할 수 없지만 끄리쉬나께서 기꺼이 우리 앞에 당신을 드러내 보여 주시도록 행동해야 한다.

끄리쉬나께서는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 당신에 대한 정보를 친히 주셨고 그것을 의심할 이유는 없다. 그저 느끼고 이해해야 할 뿐이다. 바가바드 기따는 절대적 경지에서 전해졌으므로 이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예비 단계의 자격도 필요치 않다. 끄리쉬나의 이름을 구송하는 단순한 과정이 우리가 누구인지, 절대신은 어떠한지, 또한 물질계와 영계는 무엇인지, 왜 우리가 속박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그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와 그 외 모든 것들을 단계적으로 밝힐 것이다. 사실 믿음과 계시의 과정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매일 우리가 자신 있게 믿는 어떤 것들이 나중에 드러나게 된다. 예를 들어 인도로 가게 될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을 두고 인도행 비행기 표를 살 것이다. 왜 그 표를 사는가? 우리는 그저 아무한테나 돈을 주지 않는다. 항공사는 정식인가를 받았고 비행기 또한 그러하기 때문에 믿음이 형성되었다. 믿음 없이는 삶의 일상에서 한 걸음조차 나아갈 수 없다. 따라서 반드시 믿음을 가져야 하지만 권위 있는 것에 믿음을 가져야 한다. 맹목적으로 믿을 것이 아니라 인정된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바가바드 기따는 인도에 있는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경전으로 인정받았고 인도 밖에서는 수많은 학자와 신학자들, 그리고 철학자들이 권위 있는 위대한 저술이라고 인정한다. 과학자이자 교수였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규칙적으로 바가바드 기따를 읽었다.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 절대신의 왕국인 영적 우주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출생과 늙음, 질병, 죽음이 더는 존재하지 않는 나라로 옮겨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 기쁘지 아니한가? 그런 곳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 분명 그곳에 가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할 것이다. 아무도 늙고 싶지 않고 아무도 죽고 싶지 않다. 실제로 그런 고통 없는 곳이 우리가 마음속으로 간절히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런 것을 원하는가? 그 이유는 우리에게는 그런 것을 원할 특권이 있기 때문이다. 원래 우리는 영원하고 행복하며 지식으로 가득한 존재이지만 물질적인 덫에 갇혀 참된 자아를 잊고 있다. 바가바드 기따는 우리 본래의 상태를 회복할 수 있는 혜택을 제공한다.

샹까라 철학자(Śaṅkarites)과 불교도들은 세상을 넘어서면 공허하다고 하지만 바가바드 기따는 이런 실망감을 안겨주지 않는다. 공사상은 그저 무신론자를 창조해 냈을 뿐이다. 우리는 영적 존재이고 즐거움을 원하기에 미래가 공허하다면 즉시 현재의 물질적 삶을 즐기려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이런 식으로 비인성주의자들은 공사상을 논하면서 물질적 삶을 즐길 수 있는 한 최대한 즐기고 있다. 이런 억지 추측을 즐길 수는 있겠지만 거기서 어떤 영적 혜택도 얻을 수 없다.

브라흐마-부따 쁘라산나뜨마 brahma-bhūtaḥ prasannātmā
나 쇼짜띠 나 깡샤띠 na śocati na kāṅkṣati
사마 사르베슈 부떼슈 samaḥ sarveṣu bhūteṣu
맏-박띰 라바떼 빠람 mad-bhaktiṁ labhate parām

“따라서 초월적 경지에 오른 자는 즉시 최고의 브라흐만을 깨닫게 된다. 그런 자는 더는 어떠한 것에도 한탄하지 않고 무엇을 바라지도 않으며 모든 생명체를 똑같이 대하느니라. 바로 그러한 경지에 올라야 나를 향한 순수한 봉헌을 하게 되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18.54》

헌애하는 삶의 과정을 걷고 있고 끄리쉬나를 기쁘게 섬기는 자는 자연히 물질적 쾌락에서 벗어나게 된다. 박띠에 몰입한 사람들의 특징은 끄리쉬나로 완전히 만족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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