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2
아땨하라 쁘라야사스 짜 atyāhāraḥ prayāsaś ca
쁘라잘뽀 니야마그라하하 prajalpo niyamāgrahaḥ
자나-상가스 짜 라울얌 짜 jana-saṅgaś ca laulyaṁ ca
샤디비르 박띠르 비나샤띠 ṣaḍbhir bhaktir vinaśyati
아띠-아하라하(ati-āhāraḥ): 너무 많이 먹거나 너무 많이 모으는 것, 쁘라야사하(prayāsaḥ): 너무 애쓰는 것, 짜(ca): 그리고, 쁘라잘빠하(prajalpaḥ): 한가한 대화, 니야마(niyama): 규칙과 규정들, 아그라하하(āgrahaḥ): 너무 집착하는(혹은 agrahaḥ: 너무 등한시하는), 자나-상가하(jana-saṅgaḥ): 세속적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과의 교제, 짜(ca): 그리고, 라울얌(laulyam): 갈망하거나 탐하는, 짜(ca):그리고, 샤디비히(ṣaḍbhiḥ): 이 여섯 가지에 의해, 박띠히(bhaktiḥ): 봉헌, 비나샤띠(vinaśyati): 파괴되다.
다음의 여섯 행위에 너무 얽매이면 봉헌을 망치게 된다.
(1) 필요한 양 이상 너무 많이 먹거나 필요한 자금 이상으로 모으는 것
(2) 이루기 매우 힘든 세속적 일에 과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
(3) 세속적 주제에 관해 불필요한 대화를 하는 것
(4) 경전에 적힌 규칙이나 규정을 영적 진보를 위해서가 아니라 따르는 자체에 목적을 두고 따르는 것 혹은, 경전에 적힌 규칙이나 규정을 거부하고 독립적으로,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
(5) 끄리쉬나 의식에 관심 없는 세속적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과의 교제
(6) 세속적 성취를 위해 욕심을 부리는 것
인간의 삶은 간소한 삶과 높은 사고를 위해 존재한다. 속박된 생명체는 모두 주의 세 번째 에너지에 의해 통제되기 때문에 생명체는 일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이 물질계는 설계되어 있다. 최고 인격신께서는 세 종류의 에너지 혹은 영향력을 지니고 계신다. 그 첫 번째는 안따랑가-샥띠(antaraṅga-śakti), 즉 내적 영향력이다. 두 번째는 따따스타-샥띠(taṭastha-śakti), 즉 경계 영향력이다. 세 번째는 바히랑가-샥띠(bahiraṅga-śakti), 즉 외적 영향력이다. 생명체는 경계 영향력으로 이루어졌으며 내적 영향력과 외적 영향력 사이에 위치한다. 최고 인격신의 영원한 종으로 종속된 지바뜨마(jīvātmās) 혹은 원자 생명체는 반드시 내적 혹은 외적 영향력의 통제 안에 남아 있어야 한다. 생명체가 내적 영향력의 통제 안에 있을 때, 주를 향한 끊임없는 봉헌에 종사하는 그들의 본성, 본원의 활동을 보여준다. 이것은 바가바드 기따(9.13)에 명시되어 있다.
마하뜨마나스 뚜 맘 빠르타 mahātmānas tu māṁ pārtha
다이빔 쁘라끄리띰 아스리따하 daivīṁ prakṛtim āśritāḥ
바잔띠 아난야-마나소 bhajanty ananya-manaso
갸뜨바 부따딤 아뱌얌 jñātvā bhūtādim avyayam
“오 쁘리타의 아들이여, 미혹되지 않은 위대한 영혼들은 신성한 본성의 보호 안에 있다. 그들은 내가 기원이며 소멸하지 않는 최고 인격신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나를 향한 봉헌에 완전히 종사하느니라.”
마하뜨마(mahātmā)라는 단어는 손상된 마음을 가진 자가 아니라 관대한 마음을 가진 자를 일컫는다. 손상된 마음을 가진 자는 항상 자기 감각을 만족시키는 데 임하고, 가끔 자신들의 활동을 민족주의, 인도주의 혹은 이타주의 같은 어떤 ‘주의’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선의를 베풀려고 확장하기도 한다. 가족 구성원, 공동체 혹은 사회, 국가, 세계와 같이 다른 사람의 감각 만족을 위해 자신의 개인적 감각 만족을 거부할지도 모른다. 사실 이 모든 것은 개인에서 공동체, 그리고 사회로 연장된 감각 만족이다. 이런 것들이 물질적 관점에서는 매우 훌륭해 보일지 모르나, 그런 행위에 어떤 영적 가치도 없다. 그런 활동의 토대는 개인적 혹은 연장된 범위의 감각 만족일 뿐이다. 지고(至高)의 신의 감각을 만족시킬 때, 그 사람을 마하뜨마 혹은 관대한 사람이라 부를 수 있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인용한 위 구절에서 다이빔 쁘라끄리띰(daivīṁ prakṛtim)이라는 단어는 최고인격신의 내적 영향력 혹은 즐거움 능력의 통제를 일컫는다. 이 즐거움 능력은 스리마띠 라다라니(Śrīmatī Rādhārāṇī) 혹은 그녀의 확장인 행운의 여신 락쉬미(Lakṣmī)로 나타난다. 개별 지바(jīva) 영혼이 내적 에너지의 통제 안에 있을 때 그들의 유일한 임무는 끄리쉬나(Kṛṣṇa) 혹은 비쉬누(Viṣṇu)를 만족시키는 일이다. 이것이 마하뜨마의 위치다. 마하뜨마가 아니면, 두라뜨마(durātmā), 즉 손상된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 정신이 손상된 두라뜨마들은 절대자의 외적 영향력인 마하-마야(mahā-māyā)의 통제 안에 놓인다.
실제로 이 물질계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마하-마야의 통제 안에 놓여 있고 마하-마야의 임무는 이들을 세 가지 고통의 영향을 받게 하는 것이다. 이 세가지 고통이란 아디다이비까-끌레샤(adhidaivika-kleśa, 가뭄과 지진, 폭풍처럼 하위신들에 의해 생겨나는 고통), 아디바우띠까-끌레샤(adhibhautika-kleśa, 벌레나 적처럼 다른 생명체로 인해 생겨나는 고통), 아디아뜨미까-끌레샤(adhyātmika-kleśa, 정신적, 육체적 질환처럼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인해 생겨난 고통)이다. 다이바-부따뜨마-헤따바하(Daiva-bhūtātma-hetavaḥ): 외적 에너지의 통제로 인해 세가지 고통의 영향을 받는 속박된 영혼들은 다양한 어려움으로 괴로워한다.
속박된 영혼이 직면하는 주된 문제는 출생, 노화, 질병, 죽음의 반복이다. 물질계에서 몸과 영혼을 유지하려면 반드시 일해야 하지만 어떤 방식으로 일해야 끄리쉬나 의식을 실행하기에 유리할까?
모두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 곡식, 옷, 돈과 다른 필수품 같은 소유가 필요하지만 실제로 기본적 요구를 충족시키기에 필요한 이상 더 많이 축적해서는 안 된다. 자연스러운 이 원칙을 지킨다면 육신을 유지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없을 것이다.
자연의 배열에 따르면, 낮은 진화 단계에 있는 생명체는 필요 이상 먹지도 모으지도 않는다. 따라서 동물의 왕국에는 보통 경제 문제나 필수품의 부족이 없다. 쌀자루를 공공장소에 가져다 놓으면 새들은 와서 쌀 몇 톨을 먹고는 가버린다. 하지만 인간은 자루 전체를 가지고 가버릴 것이다. 그는 자기 배가 터질 정도로 먹고, 남는 것은 보관하려 할 것이다. 경전에 따르면 필요 이상으로 모으는 이 행위(아땨하라, atyāhāra)를 금한다. 이 경향 탓에 현재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다.
필요 이상 축적하고 먹는 것은 쁘라야사(prayāsa) 즉, 불필요한 노력 또한 유발한다. 세상의 어떤 부분에 있는 누구라도 약간의 땅과 젖소가 있으면 아주 평화롭게 살 수 있게끔 절대신께서 마련해 주셨다. 한 장소에서 곡식을 생산하고 소에게서 우유를 얻을 수 있으므로 생계를 위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길 필요가 전혀 없다. 이렇게 하면 모든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다행히도 인간에게는 끄리쉬나 의식의 배양, 즉 절대신에 관한 이해, 그와 우리의 관계, 그리고 삶의 궁극적 목적인 절대신을 사랑하게 하는 더 높은 지성이 주어졌다. 그러나 불행히도, 소위 문명화된 인간은 절대신에 관한 깨달음에 신경 쓰기 보다 자신의 지성을 활용해 필요 이상으로 더 갖고, 단순히 혀를 만족시키려고 먹을 뿐이다. 절대신께서 마련해 주신 덕분에 전 세계를 통틀어 인류를 먹여 살리기에 충분한 우유와 곡식 생산 공간이 존재하지만, 더 높은 지성을 이용해 절대신에 관한 의식을 배양하는 대신, 소위 지성인은 그들의 지성을 오용하여 여러 불필요하고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생산한다. 그 결과 공장, 도살장, 윤락업소와 술집이 생겨났다.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물건을 모으지 말고, 너무 많이 먹지도 말며, 인위적 편의 시설을 소유하기 위해 불필요하게 너무 일하지도 말라고 충고하면 원시적 삶의 방식으로 되돌아가라는 충고를 한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간소한 삶과 높은 사고를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것이 그들이 처한 불행한 처지다.
인간의 삶은 절대신에 관한 깨달음을 위해 존재하고 인류에게는 이 목적을 위해 더 높은 지성이 주어졌다. 이 더 높은 지성이 더 높은 위치를 얻기 위함이라고 믿는 자들은 베다 문헌의 지시 사항을 따라야 한다. 더 높은 권위에서 나온 그런 지시 사항을 따름으로써 실제로 완벽한 지식에 이를 수 있고 삶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스리마드 바가바땀(1.2.9)에서 스리 수따 고스와미(Śrī Sūta Gosvāmī)가 인간의 올바른 다르마(dharma)를 이렇게 묘사한다.
다르마샤 히 아빠바르갸샤 dharmasya hy āpavargyasya
나르토 ’르타요빠깔빠떼 nārtho ’rthāyopakalpate
나르타샤 다르마이깐따샤 nārthasya dharmaikāntasya
까모 라바야 히 스므리따하 kāmo lābhāya hi smṛtaḥ
“모든 직업적 용무(다르마)는 분명 궁극적 해방을 위함이다. 물질적 이득을 위해 수행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 더욱이 궁극적 직무(다르마)에 임하는 자는 물질적 이익을 감각 만족 계발에 사용해서는 절대 안 된다.”
인류 문명의 첫 단계는 경전의 지시 사항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더 높은 지성을 기본적인 다르마를 이해하는 훈련에 써야 한다. 인류 사회에는 힌두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불교 등과 같이 다양한 종교 개념이 있고, 종교가 없다면 인류 사회는 동물 사회보다 나은 점이 전혀 없다.
위에 언급했듯이(다르마샤 히 아빠바르갸샤 나르토’ 르타요빠깔빠떼), 종교는 해방을 얻기 위함이지 밥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다. 가끔 인류 사회는 물질적 향상을 목적으로 하는 소위 종교 체계를 만들어내지만, 그것은 진정한 다르마와 거리가 멀다. 종교는 절대신의 법을 올바로 수행함으로써 인간을 궁극적으로 물질적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게 이끌어 주므로 그런 법에 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의 목적이다. 불행히도 사람들은 아땨하라, 즉 그런 번영에의 지나친 욕망 때문에 종교를 물질적 번영을 위해 받아들인다. 그러나 진정한 종교는 끄리쉬나 의식을 배양하는 동안 최소한의 필수품에 만족하도록 가르친다. 인간에게 경제적 발전이 필요하더라도 진정한 종교는 오로지 물질적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품만을 제공하도록 허락한다. 지바샤 따뜨바 지갸사(Jīvasya tattva jijñāsā): 진정한 삶의 목적은 절대 진리에 관해 묻는 것이다. 우리의 노력(쁘라야사)이 절대 진리를 묻는 데 쓰이지 않는다면 우리의 인위적 필요를 충족시키려고 애쓰는 데 쏟아부을 뿐이다. 영적인 것에 큰 뜻을 품은 자는 세속적 노력을 피해야 한다.
또 다른 장애는 쁘라잘빠(prajalpa), 불필요한 대화이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 우리는 즉시 두꺼비의 울음 같은 불필요한 대화를 시작한다. 대화해야만 한다면 끄리쉬나 의식 운동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끄리쉬나 의식 운동 밖에 있는 사람들은 신문, 잡지, 소설, 퍼즐 맞추기와 그 외 여러 무의미한 것들에 대단히 관심이 많다. 이런 유행 속에서 사람들은 그저 자신들의 소중한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을 뿐이다. 서양에서는 활동적인 삶에서 은퇴한 노인들이 카드놀이와 낚시, TV 시청, 쓸모없는 사회정치적 계획을 논한다. 이런 모든 것과 다른 하찮은 활동은 쁘라잘빠 범주에 속한다. 끄리쉬나 의식에 관심 있는 지적인 자는 그런 활동에 절대 참여하지 않는다.
자나-상가(Jana-saṅga)는 끄리쉬나 의식에 관심 없는 자들과의 교제를 일컫는다. 끄리쉬나 의식을 발전시키고 싶은 자는 그런 교제를 엄격하게 피해야 한다. 그러므로 스릴라 나롯따마 다사 타꾸라(Śrīla Narottama dāsa Ṭhākura)는 끄리쉬나 의식의 헌애자들과만 교제하는 삶을 살 것을 권장했다(박따-사네 바사, bhakta-sane vāsa). 우리는 절대자를 섬기는 헌애자들과 교제하며 끊임없이 절대자를 향한 봉헌에 종사해야 한다. 비슷한 일을 하는 무리와의 교제는 그 일을 발전시키기에 매우 효과적이다. 따라서 물질주의적인 자는 자신들의 노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양한 협회와 클럽을 조직한다. 예를 들면 비즈니스계에서 주식 거래소와 상공 회의소 같은 협회를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끄리쉬나 의식을 위한 국제 협회를 설립하여 사람들에게 끄리쉬나를 잊지 않는 자들과 교제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 이스콘(ISKCON) 운동이 제공하는 이 영적 교제는 날이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세계의 다양한 곳에서 많은 사람이 그들의 잠자고 있는 끄리쉬나 의식을 일깨우려고 이 협회에 참가하고 있다.
스릴라 박띠싯단따 사라스바띠 타꾸라는 아누브리띠 논평에서 지식을 얻으려고 너무 노력하는 사색가들 혹은 무미건조한 철학자들 또한 아땨하라 범주(필요한 이상 모으려는 것)에 속한다고 했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에 따르면 철학적 추론가들이 끄리쉬나 의식이 결여된 무미건조한 철학에 관해 방대한 저술을 하는 것은 전적으로 쓸데없는 짓이다. 경제 발전에 관해 방대하게 저술하는 까르미의 업적 또한 아땨하라 범주에 속하는 쓸데없는 짓이다. 마찬가지로 끄리쉬나 의식에 관한 아무 욕망도 없는 자와 과학적 지식 혹은 금전적 이득이라는 이름으로 물질적인 것을 더 많이 소유하는 데에만 관심 있는 자는 모두 아땨하라에 속박된 자들이다.
까르미들은 자신들이 어떤 위치에 있게 될지 알지 못하므로 후손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축적하려고 수고한다. 자기 자식과 손자들을 위해 더 많은 돈을 모으는 데에만 관심 있는 그런 어리석은 자들은 다음 생에 자신들이 처할 위치가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한다. 이 점에 관해 예증하는 많은 일화가 있다. 한때 대단한 까르미 한 명이 자기 자식과 손자들을 위해 엄청난 재산을 축적했지만 나중에 자신의 까르마(인과응보)에 의해 구두 수선공의 집에서 태어났는데, 그 집은 전생에 자기가 자식들을 위해 지은 건물 근처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 구두 수선공(바로 자기 자신)이 전생에 살던 자기 집에 왔을 때, 전생의 자식과 손자들은 신발로 그를 두들겨 팼다. 까르미와 갸니들이 끄리쉬나 의식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한, 결실 없는 행위에 자신의 삶을 계속해서 낭비할 뿐이다.
당장 이득을 보려고 경전에 적힌 규칙과 규정 중 어떤 부분만을 받아들이는 행위는 공리주의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니야마-아아그라하(niyama-āgraha)이고, 영적 발전을 목적으로 하는 샤스뜨라의 규칙과 규정을 소홀히 하는 것은 니야마-아그라하(niyama-agraha)라 한다. 장음 아아그라하라(āgraha)는 “받아들이고 싶은 갈망”이란 뜻이고, 단음 아그라하(agraha)는 “받아들이는 데 실패함”이란 뜻이다. 이 두 단어에 니야마(niyama, 규칙과 규정)라는 단어를 붙임으로써 니야마아그라하가 생성된다. 따라서 니야마아그라하는 특정한 단어와의 조합에 따라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끄리쉬나 의식에 관심 있는 자들은 경제적 증진을 위해 규칙과 규정을 받아들이는 데 간절해서는 안 되지만, 끄리쉬나 의식의 향상을 위해 매우 충실하게 경전에 적힌 규칙과 규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도덕적으로 용인되지 않는 성관계, 육식, 도박과 정신을 취하게 하는 것들을 피함으로써 규정 원칙을 엄격히 준수해야 한다.
바이쉬나바를 모독하기만 하는 마야바디(Māyāvādīs)들과의 교제도 피해야 한다. 물질적 행복에 관심 있는 북띠-까미(Bhukti-kāmīs)와 형태 없는 궁극(브라흐만, Brahman)에 융합됨으로써 해탈하고자 하는 묵띠-까미(mukti-kāmīs), 신비한 요가 수행으로 완성을 이루고자 하는 싯디-까미(siddhi-kāmīs)는 아땨하리(atyāhārīs, 필요 이상 모으는 자)들로 분류된다. 그런 자들과의 교제는 전혀 바람직하지 못하다.
신비한 요가를 완성함으로써 마음을 확장하고자 하고, 브라흐만의 존재 속에 융합되고자 하거나 종작없는 물질적 번영을 구하려고 하는 것은 모두 탐욕(라울야, laulya) 범주에 속한다. 그런 물질적 혜택 혹은 소위 영적 진보를 이루려는 이 모든 시도는 끄리쉬나 의식을 향한 길의 장애물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간에 벌어진 근대의 전쟁은 스릴라 루빠 고스와미께서 아땨하라에 관해 말씀하신 충고를 듣지 않은 탓이다. 현대 자본주의자들은 필요 이상의 부를 축적하고, 그들의 번영을 시기하는 공산주의자들은 모든 부와 번영을 국영화하고 싶어 한다. 불행히도 공산주의자들은 부와 부의 분배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따라서 자본주의자들의 부가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들어왔을 때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 두 철학과 반대로 끄리쉬나 의식 사상은 모든 부는 끄리쉬나께 속한다고 분명히 말한다. 따라서 모든 부가 끄리쉬나의 행정권 안에 있지 않은 한, 인간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다. 공산주의자나 자본주의자의 손에 부를 쥐여줌으로써 전혀 해결할 수 없다. 백 달러짜리 지폐가 길에 놓여 있으면 누군가가 주워 자기 호주머니 속에 얼른 집어넣을 것이다. 그런 자는 정직한 자가 아니다. 다른 사람은 그 돈을 보고 다른 자의 재산을 건드려서는 안 된다 생각하며 그 자리에 그대로 두기로 할 것이다. 비록 두 번째 사람은 자기를 위한 목적으로 그 돈을 훔치지 않았지만 그것의 올바른 사용법에 관한 인식이 없다. 세 번째 사람은 백 달러 지폐를 주워 주인을 찾아 준다. 이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그 돈을 훔치지 않았을뿐더러 무시하고 그저 길에 그대로 두지도 않았다. 주워서 주인에게 갖다 주었으므로 정직하고 현명하다.
공산주의자가 돈을 갖게 될 때 자기 감각 만족을 위해 쓰는 것이 증명되었으므로 자본주의자에게서 공산주의자로 부를 넘겨주는 것만으로 현대 정치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세상의 부는 실제로 끄리쉬나께 속하고 인간과 동물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존재의 유지를 위해 절대신의 재산을 쓸 생득권이 있다.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보다 더 취할 때, 그게 자본주의자이든 공산주의자이든 그는 도둑이며 그런 자는 자연의 법칙에 따라 벌을 면하기 어렵다.
대자연의 계획이 그러하므로 세상의 부는 모든 생명체의 복지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모든 생명체는 주의 부를 활용하여 살 권리가 있다. 절대자의 재산을 과학적으로 활용하는 기술을 배울 때 서로의 권리를 더는 침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이상적인 사회가 형성된다. 그런 영적 사회를 만들기 위한 기본적 원칙은 스리 이쇼빠니샤드의 첫 진언에 명시되어 있다.
이샤바샴 이담 사르밤 īśāvāsyam idaṁ sarvaṁ
얏낀짜 자가땸 자갓 yat kiñca jagatyāṁ jagat
떼나 땩떼나 분지타 tena tyaktena bhuñjīthā
마 그리다 까샤 스빗 다남 mā gṛdhaḥ kasya svid dhanam
“우주 안에 존재하는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모든 것은 주께서 통제하고 소유하신다. 그러므로 자신에게 할당된 필요한 양만큼만 수용해야 하고, 그 외의 것은 누구에게 속하는지 잘 이해하여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끄리쉬나 의식의 헌애자들은 이 물질계는 절대자께서 완전히 마련해 주신 덕분에 모든 생명체가 삶에 필요한 것이 서로 다른 생명체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고도 얻어지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자신들의 진정한 필요에 따라 모두가 적절한 양의 부를 얻을 만하도록 완전히 갖추어져 있고, 따라서 모든 이가 간소하고 높은 사고라는 원칙에 따라 평화롭게 살 수 있다. 불행히도, 절대신의 계획에 아무런 믿음도, 더 높은 영적 발전을 향한 아무런 열망도 없는 물질주의자들은 절대신께서 주신 지성을 물질적 소유를 늘리는 데에만 잘못 사용한다. 그들은 자신의 물질적 위치를 향상시키려고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적 공산주의같이 많은 제도를 궁리해 낸다. 그들은 절대신의 법이나 더 높은 목적에는 관심이 없다. 감각 만족이라는 한정 없는 욕망을 성취하고자 항상 노심초사하며 다른 생명체를 착취하는 데 자기 능력을 사용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인류 사회가 스릴라 루빠 고스와미께서 열거하신 이 기본적 결함(아땨하라 등)을 포기한다면 인간과 동물, 자본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그 밖의 다른 관계 간에 존재하는 모든 적대감은 중지될 것이다. 덧붙여 경제적 혹은 정치적 불균형으로 생겨나는 모든 문제와 불안정 역시 해결될 것이다. 이 순수한 의식은 올바른 영적 교육과 끄리쉬나 의식 운동이 과학적으로 제공하는 실천에 의해 일깨워진다.
끄리쉬나 의식 운동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올 영적 공산주의를 제공한다. 지성을 갖춘 사람이면 누구나 자신의 의식을 정화하고, 전심전력을 다 해 이 끄리쉬나 의식 운동을 은신처로 삼아 위에 언급된 봉헌에 방해가 되는 여섯 장애물을 제거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