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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헌애(獻愛)로 일하는 요가

우리는 다양한 이름의 요가와 요가행자(요기)들에 관해 들었는데, 바가바드 기따에서 진정한 요가행자는 “자신을 전적으로 나에게 바치는 사람"이라고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셨다. 끄리쉬나께서는 속세를 버리는 행위(산냐사, sannyāsa)와 요가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고 선언하셨다.

얌 산냐삼 이띠 쁘라후 yaṁ sannyāsam iti prāhur
요감 땀 빋디 빤다바 yogaṁ taṁ viddhi pāṇḍava
나 햐산냐스따-상깔뽀 na hy asannyasta-saṅkalpo
요기 바바띠 까스짜나 yogī bhavati kaścana

“초연함과 요가, 즉 절대자와 자신을 연결하는 것은 같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오 빤두(Pāṇḍu)의 아들이여, 감각 만족을 위한 욕망을 버리지 않는 한 절대 요가행자가 될 수 없다.” 《바가바드 기따 6.2》

바가바드 기따는 세 가지 기본적 요가, 즉 까르마 요가(karma-yoga), 갸나 요가(jñāna-yoga), 박띠 요가(bhakti-yoga)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요가 체계는 계단을 오르는 것과 비슷하다. 어떤 이는 첫 번째 계단에, 어떤 이는 중간쯤에, 또 다른 이는 계단 꼭대기에 올라와 있을 수 있다. 일정한 수준에 이르게 되면 까르마 요가행자 또는 갸나 요가행자 등으로 통한다. 어떤 단계이든 절대자를 섬긴다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다. 단지 봉사의 차원이 다를 뿐이다. 따라서 스리 끄리쉬나께서는 아르주나에게 버림과 요가는 같은 것임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이유는 욕망과 감각 만족에서 자유로워지지 않으면 요가행자도, 세속을 떠난 유행승(流行僧: 산냐시, sannyāsī)도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돈을 벌기 위해 요가를 하는 요가행자들이 있는데, 그것은 진정한 요가가 아니다. 모든 것을 절대자에 대한 봉사에 이바지해야 한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유행승으로, 요가행자로, 철학자로든, 무슨 일을 하든지 끄리쉬나 의식으로 해야 한다. 끄리쉬나께 봉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하고, 그러한 의식으로 일할 때 우리는 진정한 유행승이자 요가행자가 될 수 있다. 요가수행에 첫발을 내디딘 사람도 일은 해야 한다. 요가 수행을 한다고 해서 일을 그만두어야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끄리쉬나께서는 아르주나에게 요가행자가 되라고 하셨지만, 결코 전사의 의무인 싸움을 그만두라고 하신 적은 없다. 우리의 생각과는 참으로 반대이다. 물론 요가행자인 동시에 어떻게 전사가 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생길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요가 수행은 외딴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곧게 앉아 반 눈 뜨고 코끝을 응시하며 집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끄리쉬나께서는 아르주나에게 요가행자가 되라는 동시에 끔찍한 전쟁에도 가담하라고 하시는가? 바로 이것이 바가바드 기따의 신비로움이다. 즉, 어떻게 한 사람이 전사인 동시에 최고의 요가행자, 최고의 유행승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그 답은 바로 끄리쉬나 의식 속에 있다. 오직 끄리쉬나를 위해 싸우고, 끄리쉬나를 위해 일하고, 끄리쉬나를 위해 먹고, 끄리쉬나를 위해 자고, 모든 행위를 끄리쉬나에게 바치면 된다. 이런 식으로 최고의 요가행자, 최고의 유행승이 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비결이다.

바가바드 기따 6장에서 스리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요가 명상법을 가르치셨으나 아르주나는 너무 어렵다고 이를 거부했다. 그런데 어떻게 아르주나가 위대한 요가행자로 간주되는가? 아르주나가 명상법을 거부했지만, 끄리쉬나께서는 그를 최고의 요가행자로 선언하시는데 그 이유는 “그대는 항상 나를 생각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끄리쉬나를 생각하는 것이 모든 요가 수행법 즉, 하타요가, 까르마요가, 갸나요가, 박띠요가 혹은 그 어떤 종류의 요가와 희생, 자선 활동들의 본질이다. 영적 깨달음을 구하고자 알려진 모든 행위는 결국 끄리쉬나 의식, 끄리쉬나를 생각하는 것에 귀결된다. 인간 삶의 진정한 성공과 완성은 항상 끄리쉬나 의식을 갖고 어떠한 행위를 하든 늘 끄리쉬나를 염두에 두는 데 있다.

준비단계에서는 끄리쉬나를 위해 항상 육체적 노동을 할 것을 권한다. 잠시라도 나태한 것은 좋지 않으므로 항상 어떤 임무나 일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일에 종사하면서 실제로 발전하게 되고, 그런 다음에는 육체노동을 하지 않아도 항상 끄리쉬나에 대한 생각으로 다른 모든 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준비단계에서도 자신의 다섯 감각을 항상 끄리쉬나를 위한 봉헌에 이바지해야 한다. 끄리쉬나를 위한 봉헌의 종류는 다양한데, 끄리쉬나 의식을 위한 국제협회는 이러한 활동에 참여하길 바라는 사람들을 지도하고 돕기 위해 조직되었다. 진정으로 끄리쉬나 의식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낮에 종일토록 일해도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 항상 할 일이 밤낮으로 있지만, 끄리쉬나 의식의 초심자들은 그런 임무를 즐겁게 행한다. 끄리쉬나를 위해 늘 일하고 끄리쉬나 의식을 전 세계에 알리려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단계이다. 세속의 일상에서는 밤낮없이 일한다면 분명 지치고 말겠지만, 끄리쉬나 의식으로 일한다면 하루 24시간 하레 끄리쉬나를 구송하고 봉헌에 종사해도 절대 지치지 않는다. 세속적 음률을 반복하면 곧 싫증 나기 마련이지만, 영적 음률의 반복은 결코 우리를 지치게 하지 않는다. 영적 차원에서는 지치는 법이 없다. 영적 차원은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반면 세속적 일상을 사는 모든 사람은 감각 만족을 위해 일한다. 그리고 속세에서 노동으로 거둔 이익은 감각 만족에 쓰인다. 그러나 진정한 요가행자는 그러한 결실을 바라지 않는다. 그는 끄리쉬나를 위해서가 아니라면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으며 끄리쉬나는 이미 그와 함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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