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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아르주나가 거부한 요가

오늘날 서양에 많은 요가 수행법이 보급되고 있지만 어떤 것도 요가를 완성하는 법에 대해서는 제대로 가르치고 있지 않다. 바가바드 기따(Bhagavad gītā)에서 최고인격신, 스리 끄리쉬나(Śri Kṛṣṇa)께서는 아르주나에게 친히 진정한 요가의 완성법을 가르치신다. 바가바드 기따가 전하는 요가의 궁극에 이르는 과정에 참여한다면 절대자의 말씀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꾸룩쉐뜨라(Kurukshetra)라는 전쟁터 한가운데서 요가의 진수를 가르쳤다는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하다. 동족상잔의 전쟁을 치르기 바로 전 전사(戰士) 아르주나에게 이 가르침이 전수되었다. 개인적 감정에 휩쓸려 “왜 나는 내 동족과 싸워야만 하는가?”라고 아르주나는 생각했다. 그런 주저함은 아르주나의 잘못된 생각에서 비롯되었고, 바로 이 망상을 없애기 위해 끄리쉬나께서 바가바드 기따를 말씀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얼마나 짧은 시간 안에 바가바드 기따가 말씀되었는지를 상상할 수 있다. 실제로 양 진영의 군사들이 싸울 태세를 하는 와중의 짧은 시간인 채 한 시간도 못 되는 사이 바가바드 기따가 설(說)해졌다. 바로 이 한 시간 안에 끄리쉬나께서는 모든 요가의 진수를 당신의 친구 아르주나에게 설명해 주셨다. 이 위대한 담론 끝에 아르주나는 모든 의혹을 떨쳐버리고 다시 일어나 싸우게 되었다.

그러나 담론 중 명상적 요가법, 즉 어떻게 앉고, 어떻게 몸을 바로 세우고, 어떻게 반 눈 뜬 자세를 하고, 어떻게 주의를 다른 데 돌리지 않고 코끝을 응시해야 하는지, 또한 외딴곳에서 홀로 수행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들었을 때 아르주나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요’ 얌 요가스 뜨바야 쁘록따하 yo 'yaṁ yogas tvayā proktaḥ
삼예나 마두수다나  sāmyena madhusūdana
에따샤함 나 빠샤미 etasyāhaṁ na paśyāmi
짠짤라뜨밧 스티띰 스티람 cañcalatvāt sthitiṁ sthirām

 “오, 마두수다나(Madhusudana), 당신께서 요약 설명해 주신 요가 수행법이 저에게는 실행 불가능하고 참아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마음이란 가만있지 못하고 불안정하기 때문입니다.” 《바가바드 기따 6.33》 이것은 중요한 대목이다. 우리가 처한 세속적 상황 속에서 마음은 매 순간 동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사실 우리는 그리 안락한 환경에 놓여 있지 않다. 우리가 처한 상황을 바꾸면 마음의 동요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어떤 위치에 이르면 마음의 동요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속세의 특성상 우리는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고민거리는, 문제를 해결하고자 항상 노력하더라도 결코 그 해답을 찾을 수 없도록 설계된 우주에 있다.

 숨김없이 솔직하고 열린 마음으로 아르주나는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신 요가 수행법을 자신이 실천하기는 어렵다고 고백한다. 아르주나가 끄리쉬나께 드린 말씀 속에 그를 ‘마두’, 즉 ‘악마를 죽인 자’라는 뜻의 ‘마두수다나’로 지칭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끄리쉬나께서는 하나의 일화마다 그에 맞는 이름을 갖고 계시므로 수없이 많은 이름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정녕코 절대신께서는 셀 수 없이 많은 행위를 하시며, 그에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이름이 붙여진다. 우리는 절대신의 작은 일부에 지나지 않고,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사건이 우리에게 일어났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다. 절대신은 영원불변하고 무한하며, 그의 일화(逸話) 또한 무한하므로 무수히 많은 이름을 갖고 계신데, 그 중 대표적 이름이 끄리쉬나이다. 그런데 끄리쉬나의 친구로서 아르주나는 그를 끄리쉬나로 부를 수 있었을 텐데 왜 마두수다나라고 했을까? 그 답은 아르주나가 자기 마음을 ‘마두’라는 큰 악마와 같다고 간주한 데 있다. 끄리쉬나께서 마음이라는 악마를 제거해 주실 수 있다면, 아르주나는 요가의 궁극적 경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제 마음은 이 악마 마두보다 훨씬 강하니, 제발 당신께서 제 마음을 잡아 주신다면 제가 이 요가를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아르주나와 같은 위인의 마음조차 항상 동요한다. 아르주나가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처럼,

짠짤람 히 마나 끄리쉬나 cañcalaṁ hi manaḥ kṛṣṇa
쁘라마티 발라받 드리담 pramāthi balavad dṛḍham
따샤함 니그라함 만예 tasyāhaṁ nigrahaṁ manye
바요리바 수-두쉬까람 vāyor iva su-duṣkaram

“마음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동요하며, 완고하고 몹시 강하기 때문에 오, 끄리쉬나여, 제 생각에 이를 통제하는 것은 바람을 다스리는 것보다 더 어려운 듯 합니다.” 《바가바드 기따 6.34》

 마음이란 항상 ‘이리로 가라 저리로 가라,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하며 우리에게 나아갈 방향을 일러준다. 따라서 요가 체계의 전체와 본질은 바로 이 흔들리는 마음을 통제하는 데 있다. 명상적인 요가법에서는 절대 영혼에 집중함으로써 마음을 통제할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모든 요가의 진정한 목적이다. 하지만 아르주나는 이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부는 바람을 멈추게 하기보다 더 어렵다고 말한다. 양팔을 벌려 태풍을 멈추려는 자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라. 이를 두고, 단지 아르주나가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자질이 부족해서라고 단정 지을 수 있는가? 실제로 우리는 아르주나가 가진 여러 훌륭한 자질을 이해조차 할 수 없다. 그는 최고인격신의 친한 친구로 이것은 대단히 높은 지위이고 훌륭한 자질 없이는 절대 얻을 수 없다. 이에 더해 아르주나는 위대한 전사로 명성이 높았으며 훌륭한 통치자이기도 했다. 또한, 높은 지능의 소유자로, 현재 학자들이 평생을 거쳐도 이해하지 못하는 바가바드 기따를 한 시간 안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아르주나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더 진보한 시대에 살고 있던 아르주나에게 불가능했던 것이 더 퇴보한 시대에 있는 우리에게 가능하리라 생각하는가? 아르주나와 우리가 같은 위치에 있다고 단 한 순간도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보다 훨씬 열등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르주나가 요가 수행을 한 적이 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도 끄리쉬나께서는 아르주나를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칭송하고 계시다. 아르주나가 갖고 있는 훌륭한 자질이란 과연 무엇인가? 끄리쉬나께서는 그에게 “너는 나의 헌애자(獻愛者, devotee)이며 가장 소중한 친구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러한 자격에도 아르주나는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신 명상적인 요가를 수행할 수 없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하겠는가? 마음이란 통제될 수 없다고 낙담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마음은 다스릴 수 있으며, 그 과정이 바로 끄리쉬나 의식이다. 마음을 항상 끄리쉬나에 두어야 한다. 마음을 끄리쉬나에게 몰두하고 있는 한 요가의 완성을 이룰 수 있다.

이제 스리마드 바가바땀(Śrīmad-Bhāgavatam)을 살펴보면, 제12권에 슈까데바 고스와미(Śukadeva Gosvāmī)께서 빠릭싯(Mahārāja Parīkṣit)왕에게 사땨 유가(Satya-yuga)라고 하는 황금시대에는 사람들이 십만 년을 살았으며, 당시 그런 오랜 수명을 누렸을 때는 명상적인 요가를 수행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 명상법을 통해 사땨 유가에 이룰 수 있었던 것을 다음 시대인 뜨레따 유가(Tretā-yuga)에는 엄청난 희생을 통해, 그 다음 시대인 드바빠라 유가(Dvāpara-yuga)에는 사원 숭배로써, 그리고 현 시대인 깔리 유가(Kali yuga)에는 단지 절대신의 이름, 하레 끄리쉬나(Hare Kṛṣṇa)를 구송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권위 있는 출처를 통해 우리는 "하레 끄리쉬나, 하레 끄리쉬나, 끄리쉬나 끄리쉬나, 하레 하레 /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Hare Kṛṣṇa, Hare Kṛṣṇa, Kṛṣṇa Kṛṣṇa, Hare Hare / Hare Rāma, Hare Rāma, Rāma Rāma, Hare Hare)"를 구송하는 것이 이 시대에 합당한 요가의 완성을 구현하는 방법임을 알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는 아주 힘들게 50~60년의 수명을 유지하며, 장수한다고 해도 고작 80~100년을 산다. 게다가 이 짧은 기간 동안 전쟁, 질병, 기근과 다른 문제들로 늘 불안과 어려움을 겪는다. 또한, 우리는 그렇게 총명하지도 못하며 불운하다. 이러한 것들이 타락한 시대인 깔리 유가에 사는 사람들의 특징이다. 따라서 제대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신 명상적인 요가의 경지에 이르는 데 성공할 수 없다. 기껏해야 이 명상법의 잘못된 변형을 통해 종잡을 수 없는 자신의 일시적 기분만 만족하게 할 뿐이다. 따라서 돈을 내고 체조 같은 요가와 심호흡법 수업에 참가해, 몇 년 정도 수명을 늘리거나 더 나은 성생활을 즐길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며 행복해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요가수행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시대에는 명상수행을 바르게 실천할 수 없다. 반면 그런 요가의 진정한 완성은 끄리쉬나 의식의 숭고한 과정인 박띠요가(Bhakti-yoga), 특히 하레 끄리쉬나 구송을 통해 스리 끄리쉬나를 찬미하는 만뜨라 요가(Mantra-yoga)로 구현할 수 있다. 베다(Veda) 경전은 바로 이것을 권장하고 있으며 짜이따냐 마하쁘라부(Caitanya mahāprabhu)와 같은 위대한 권위자들이 이를 도입했다. 실제로 바가바드 기따에서도 공언하기를 마하뜨마(Mahatma), 즉 위대한 영혼들은 항상 절대신의 영광을 찬양한다고 했다. 베다 경전과 바가바드 기따, 그리고 위대한 권위자들의 관점에서 마하뜨마가 되고 싶다면 이 끄리쉬나 의식 과정과 하레 끄리쉬나 구송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가부좌를 틀고 곧게 앉아서 일종의 연기자처럼 최면상태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명상에 만족한다면 이는 별개의 문제이다. 하지만 그러한 흉내는 요가의 참된 완성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가짜 약으로 세속의 병을 치료할 수는 없다. 끄리쉬나로부터 직접 올바른 치료를 받아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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