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삼사라(Saṁsāra)를 초월하는 지식
끄리쉬나께서는 이 끄리쉬나 의식의 과정은 수수캄(susukham), 즉 아주 즐겁고 쉽게 실천할 수 있다고 구체적으로 말씀하셨다. 실제로 헌애의 과정(devotional process)은 매우 즐거운데, 우리가 악기로 연주하며 흥겨운 노래를 부르면 사람들이 실제로 경청하거나 함께 노래하기도 한다(스라바남 끼르따남: śravaṇaṁ kīrtanam, 스리마드 바가바땀 7.5.23). 물론 음악은 지고의 신과 관계있는 것이어야 하고 그를 찬미하는 내용이어야 한다. 바가바드 기따를 듣는 것 또한 봉헌(devotional service)의 한 부분이고, 여기서 더 나아가 들은 내용에 따라 자기 삶에 적용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끄리쉬나 의식은 과학이므로 맹목적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봉헌의 과정으로 권장된 아홉 가지 방법이 있다(듣기, 구송하기, 기억하기, 숭배하기, 기도하기, 접대하기, 절대자의 종으로서 매사에 임하기, 절대자와 친한 관계 맺기, 모든 것을 절대자에게 바치기). 이 모든 과정은 실천하기가 쉽고 즐겁게 수행되어야 한다.
물론 바가바드 기따와 하레 끄리쉬나 만뜨라를 힌두 제도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사람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 또한 교회에 가서 노래할 수 있다. 그 사람이 선택한 과정과 이 과정에는 어떤 차이도 없다. 요점은 자기가 따르는 어떤 과정이든 신의식(God conscious)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절대신은 이슬람교도, 힌두교도, 기독교인도 아니다. 그는 절대신이다. 우리 또한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인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모두 절대신의 부분이고 순수한 영혼이다. 절대신은 빠비뜨람(pavitram), 즉 순수하고, 우리도 순수하다. 그러나 어떤 연유(緣由)로 이 물질적 대양에 빠져버렸고 파도가 칠 때마다 고통받는다. 사실 우리는 흔들리는 물질적 고통의 파도와 무관한 존재다. 그저 “끄리쉬나, 제발 저를 꺼내 주세요.”라고 기도해야 할 뿐이다. 우리가 끄리쉬나를 잊자마자 환영의 대양이 있고, 그 대양이 우리를 포획한다. 하레 끄리쉬나 구송은 우리를 이 대양에서 탈출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구송이다. 하레 끄리쉬나, 하레 끄리쉬나, 끄리쉬나 끄리쉬나, 하레 하레/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는 끄리쉬나와 다르지 않은 소리(샤브다: śabda)이다. ‘끄리쉬나’라는 소리와 원래의 끄리쉬나는 똑같다. 우리가 하레 끄리쉬나를 구송하고 춤출 때, 끄리쉬나 역시 우리와 함께 춤춘다. 물론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데.”라고 말할지도 모르나, 왜 보는 것만을 그토록 강조해야 하는가? 듣는 것은 왜 강조하지 않는가? 보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지고, 듣는 행위 모두 경험과 지식을 얻기 위한 도구이다. 우리는 왜 보는 것만 그토록 강조하는가? 헌애자는 끄리쉬나를 보는 것을 소망하지 않는다. 끄리쉬나에 관해 듣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끄리쉬나를 뵙는 일도 결국에는 가능하겠지만 듣는 것이 덜 중요하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가 들을 수 있지만 볼 수 없는 것들이 이 세상에는 많다. 휘파람 소리가 우리 귀를 스쳐 지나면 그것을 들을 수는 있지만 바람을 절대 볼 수는 없다. 듣기가 보기보다 덜 중요한 것이 아니고 타당한 경험이므로 우리는 끄리쉬나를 듣고 소리를 통해 당신의 존재를 깨닫는다. 스리 끄리쉬나 당신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내 보금자리 혹은 명상하는 요가행자의 가슴속에는 없지만, 나의 순수한 헌애자들이 노래하는 곳에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실제로 영적으로 성장할수록 끄리쉬나의 존재를 느낄 수 있다.
끄리쉬나께 받기만 하고, 아무것도 바치지 않아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절대신께 무언가를 얻고 있는데 왜 어떤 것도 그에게 바치지는 않는가? 우리는 끄리쉬나께 빛, 공기, 식량, 물 등을 비롯해 수많은 것을 얻고 있다. 끄리쉬나께서 이런 자원을 공급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살 수 없다. 계속 받기만 하고 보답으로 아무것도 안 주는 것이 사랑인가? 사랑은 주고받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누군가로부터 계속 받기만 받고,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착취이다. 끄리쉬나께 아무것도 바치지 않고 계속해서 먹기만 해서는 안 된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끄리쉬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빠뜨람 뿌쉬땀 팔람 또얌 patraṁ puṣpaṁ phalaṁ toyaṁ
요 메 박땨 쁘라얏차띠 yo me bhaktyā prayacchati
딷 아함 박띠-우빠흐릿땀 tad ahaṁ bhakty-upahṛtam
아스나미 쁘라야따뜨마나하 aśnāmi prayatātmanaḥ
얏 까로쉬 얃 아스나시 yat karoṣi yad aśnāsi
얏 주호쉬 다다시 얏 yaj juhoṣi dadāsi yat
얏 따빠샤시 까운떼야 yat tapasyasi kaunteya
땃 꾸루스바 맏 아르빠남 tat kuruṣva mad arpaṇam
“나에게 사랑과 헌애로 잎 하나, 꽃 한 송이, 과일 하나 또는 물을 바치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노라. 오 꾼띠의 아들이여, 무엇을 하든, 무엇을 먹든, 무엇을 바치거나 나누어 주든, 어떠한 고행을 하든 그것을 나에게 바치는 봉헌물로 하여라.”《바가바드 기따 9.26~27》
주고받는 것에 더해, 봉헌할 때는 우리가 가진 걱정과 속사정이 무엇이든 끄리쉬나께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끄리쉬나, 저는 지금 이런 식으로 고통받고 있어요. 철썩이는 이 물질적 환영이라는 대양에 빠졌어요. 친절을 베푸시어 저를 여기서 끌어올려 주세요. 대서양에 빠진 것처럼 제가 이곳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이제 이해합니다. 이 대서양이 제 본래의 정체성이 아닐 텐데 이 철썩이는 대양에 종속되었어요. 사실 전 영적 불꽃이고, 당신의 부분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불행히도 우리는 이 대양과 우리를 동일시하려 하고 있고 그와 동시에 그 파도를 멈추려 한다. 파도를 멈추려고 노력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자연의 법칙으로 파도는 계속 칠 것이다. 오직 바보만이 이 세상에 적응하려고 한다. 진짜 문제는 어떻게 여기서 빠져나오는가 하는 것이다. 이곳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자와 끄리쉬나께 절대 향하지 않는 자는 계속해서 생사의 대양 속에서 윤회하게 되어있다.
아스랏다다나 뿌루샤 aśraddadhānāḥ puruṣā
다르마샤샤 빠란따빠 dharmasyāsya parantapa
아쁘라뺘 맘 니바르딴떼 aprāpya māṁ nivartante
므리뜌-삼사라-바르뜨마니 mṛtyu-saṁsāra-vartmani
“이 봉헌에 믿음이 없는 자들은 나에게 이를 수 없다, 오 적을 없애는 자여. 따라서 그들은 이 물질계의 삶과 죽음의 길로 다시 돌아오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9.3》
종교는 절대신과 우리를 연결한다는 뜻이다. 만일 우리와 절대신을 연결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다. 종교는 절대신을 찾고, 이해하고, 절대신과의 관계를 확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종교다. 봉헌에 임하는 자는 끄리쉬나 혹은 절대신을 위해 일하기 때문에 봉헌으로 절대신과 연결된다. 끄리쉬나 의식이 바로 종교다.
종교를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진정한 종교는 권위 있는 출처에서 나와야 하고, 그 출처는 절대신이거나 당신의 대리인이어야 한다. 종교는 절대신의 법칙이라고 불려 왔다. 개인이 나라의 법을 만드는 일은 불가능하다. 법이 있고, 그 법은 국회가 만든 것이다. 누군가가 자기만의 사회를 위해 어떤 내규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나, 이런 법 또한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떤 종교 원칙을 만들고 싶다면 베다 권위자(Vedic authority)로부터 반드시 허가받아야 한다.
바가바드 기따 또한 종교다. 라마누자짜리아(Rāmānujācārya), 마드바짜리아(Madhvācārya), 비쉬누스바미(Viṣṇu Svāmī), 주 짜이따냐(Lord Caitanya), 샹까라짜리아(Śaṅkarācārya) 같은 위대한 권위자들과 다른 많은 사람이 바가바드 기따를 종교의 주된 원칙으로 받아들였고, 끄리쉬나를 최고 인격신(Supreme Personality of Godhead)으로 인정했다. 거기에는 어떤 의심의 여지도 없다. 서양에서도 바가바드 기따는 위대한 철학 서적으로 인정받았고 서양의 많은 위대한 학자들과 철학자들이 이 책을 읽고 주석을 달았다. 학자들과 아짜리아( ācāryas: 스승)들이 인정했는데도 바가바드 기따를 인정하지 않고 믿음이 없는 자들이 여전히 있다. 그들은 바가바드 기따가 끄리쉬나라는 사람이 지은 어떤 감상주의적 과장으로 생각하고 권위로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끄리쉬나께서 위에 인용된 구절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바가바드 기따의 권위를 부정하는 자들은 당신과 어떤 식으로도 연결될 수 없다고 하시는데, 이는 그들이 당신과 어떤 관련도 없기 때문이고 그런 자들은 출생과 죽음의 순환을 반복하도록 남겨진다. 아쁘라뺘 맘 니바르딴떼 므리뜌-삼사라-바르뜨마니(Aprāpya māṁ nivartante mṛtyu-saṁsāra-vartmani). 삼사라에 종속됨은 생사의 순환을 의미하고 다음 생에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할 수 있는 편의를 반드시 얻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어쩌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을 수도 있고, 미국이나 인도, 혹은 이 행성에 태어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떤 것도 확실치 않다. 우리가 한 행동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생사의 길에서 우리는 출생을 맞게 되고 얼마간 머물며 즐기거나 고통받은 후 다시 이 몸을 포기하고 다른 어미의 자궁으로 들어가 사람으로 혹은 동물로 태어나 다시 행위를 시작함으로써 또다시 다른 몸을 받을 준비를 한다. 이것을 ‘므리뜌-삼사라-바르뜨마니’라 한다. 이 과정을 피하고 싶다면 반드시 끄리쉬나 의식을 시작해야 한다.
유디스티라 마하라자(Yudhiṣṭhira Mahārāja)가 “이 세상에서 가장 경이로운 것이 무엇입니까?”란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했다. “가장 경이로운 것은 매일, 매 순간 사람들이 죽고 있지만, 모두 죽음이 자기에게는 오지 않을 거로 생각하는 것이다.” 매분, 매초 생명체가 죽음의 전당으로 가고 있는 것을 경험한다. 사람, 곤충, 동물, 새, 모두 죽고 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므리뜌로까(mṛtyuloka), 즉 죽음의 행성으로 불린다. 매일 부고를 접할 수 있고 묘지나 화장터에 가면 그것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 “어떤 식으로든 나는 살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모두 죽음의 법칙에 종속되어 있지만 아무도 이를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환영이다. 우리가 영원히 살 것으로 생각하고,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든 계속해서 하며 거기에 관해 책임지지 않을 것으로 느끼는 것, 그것이 환영이다. 이것은 아주 위태로운 삶이고, 환영의 가장 깊은 부분이다. 우리는 매우 진지해져야 하고, 죽음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 ‘죽음처럼 확실한’ 이런 표현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이고, 아무도 피할 수 없다는 의미다. 죽음이 찾아오면 잘난 철학도, 고학력도 더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때가 되면 아무도 관심 가져 주지 않을 우리의 튼튼한 몸과 지성은 사라진다. 그때 단편적 부분(지바뜨마: jīvātmā)이 물질적 본성의 명령 아래 놓이게 되고 쁘라끄리띠(prakṛti: 자연)가 우리에게 적합한 육신을 제공한다. 이런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고 싶다면 끄리쉬나를 회피해도 된다. 이런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끄리쉬나께서 도와주러 오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