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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4절

박땨 뜨바난야야 샤꺄 bhaktyā tv ananyayā śakya
아함 에밤-비도’르주나 aham evaṁ-vidho ’rjuna
갸뚬 드라쉬뚬 짜 땃뜨베나 jñātuṁ draṣṭuṁ ca tattvena
쁘라베쉬뚬 짜 빠란따빠 praveṣṭuṁ ca paran-tapa

박땨: 봉헌으로, 뚜: 그러나, 아난야야: 결실적 행위나 관념적 지식에 물들지 않은, 샤꺄하: 가능한, 아함: 나는, 에밤-비다하: 이처럼, 아르주나: 오 아르주나, 갸뚬: 알다, 드라쉬뚬: 보다, 짜: 그리고, 땃뜨베나: 사실상, 쁘라베쉬뚬: 들어가다, 짜: 또는, 빠란따빠: 오 강력한 힘을 가진 자여.

나의 소중한 아르주나여, 오직 완전한 봉헌으로만 네 앞에 서 있는 나를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있으며, 결국 직접 볼 수 있느니라. 오직 이 방법으로 너는 나를 이해하는 신비로움 속에 들어갈 수 있느니라.

끄리쉬나는 오직 완전한 봉헌의 과정으로만 이해될 수 있다. 이 절에서 끄리쉬나께서 이것을 아주 명확히 설명하셔서 자기들만의 추측으로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하고자 하는 공인되지 않은 논평가들이 그저 시간만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그 누구도 끄리쉬나를 이해할 수 없으며 당신이 어떻게 부모 앞에 네 팔의 형상으로 나타났다가 곧 두 팔 형상으로 바꾸셨는지도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것을 베다를 공부하거나 철학적 사색으로 이해하기는 몹시 어렵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분명히 말하기를, 그 누구도 끄리쉬나를 볼 수 없으며 이러한 주제를 이해할 수도 없다. 하지만 베다 문헌에 매우 정통한 학생들은 아주 여러 분야의 베다 문헌을 통해 끄리쉬나에 관해 배울 수 있다. 베다에는 아주 많은 규칙과 규정이 있으며, 끄리쉬나를 조금이나마 이해하고자 한다면 권위 있는 문헌이 설명하는 이 규정 원칙들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원칙에 따라 고행을 행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고행을 엄격히 수행하기 위해 끄리쉬나께서 태어나신 날인 잔마쉬따미(Janmāṣṭamī)날과 에까다시(Ekādaśī 새로운 달이 뜬 후 11일째와 보름달 후의 11일째) 두 날에 단식할 수 있다. 자선에 관한 한, 끄리쉬나 철학, 즉 끄리쉬나 의식을 전 세계에 전파하는, 봉헌에 종사하는 끄리쉬나의 헌애자에게 베풀어야 한다. 끄리쉬나 의식은 인류에 대한 축복이다. 루빠 고스와미께서 주 짜이따냐를 가장 자비로운 인간으로 묘사했는데, 그 이유는 무척 얻기 어려운 끄리쉬나를 향한 사랑을 당신이 대가 없이 나누어 주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끄리쉬나 의식을 전파하는 데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주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자선이다. 그리고 규정에 따라 사원에서 숭배하는 것은 최고인격신에게 존경을 표함으로써 영적으로 진보하는 기회이다(인도에는 비쉬누나 끄리쉬나 신상을 모시는 사원이 많이 있다). 주를 향한 봉헌의 초심자들에게 사원 숭배는 필수적이며, 이것은 베다 문헌에서도 확증된다(스베따스바따라 우빠니샤드 6.23).

야샤 데베 빠라 박띠르 yasya deve parā bhaktir
야타 데베 따타 구라우 yathā deve tathā gurau
따샤이떼 까티따 햐르타하 tasyaite kathitā hy arthāḥ
쁘라까샨떼 마하뜨마나하 prakāśante mahātmanaḥ

지고한 주를 향한 흔들림 없는 헌애심을 가진 자와 유사한 흔들림 없는 신념을 가진 영적 스승의 지도를 받는 자는 최고인격신의 드러내심을 통해 당신을 볼 수 있다. 정신적 사색만으로 우리는 끄리쉬나를 이해할 수 없다. 진정한 영적 스승의 지도 아래 훈련받지 않는 자는 끄리쉬나를 이해하는 과정의 시작조차 불가능하다. 뚜(tu)라는 말이 여기에서 특별히 사용된 것은 다른 어떠한 방법으로도 끄리쉬나를 이해할 수 없음을 나타낸다.

두 팔을 한 끄리쉬나의 인격적 형상이나 네 팔 형상은 “수-두르다르샴, 즉 보기가 무척 어렵다”라고 묘사되었다. 이 형상들은 아르주나에게 보여준 일시적인 우주적 형상과는 완전히 다르다. 네 팔의 끄리쉬나와 두 팔의 끄리쉬나는 영원하고 초월적이지만, 아르주나에게 드러내신 우주적 형상은 일시적이다. “뜨밧 아녜나 나 드리쉬따-뿌르밤(tvad anyena na dṛṣṭa-pūrvam)”이라는 말은 아르주나 이전에 그 우주적 형상을 본 사람이 없음을 명시한다. 이것은 또한 헌애자들에게 그것을 보여줄 필요가 없음을 나타낸다. 아르주나의 요구로 끄리쉬나가 이 형상을 보여주신 이유는 누군가 자기가 신의 화신이라 주장하면 사람들이 그에게 우주적 형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다.

앞 절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 나(na)라는 말은 베다를 전공해서 얻은 대학 학위를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끄리쉬나를 향한 봉헌에 착수해야 한다. 그래야만 바가바드 기따에 관한 논평을 쓸 시도를 할 수 있다.

끄리쉬나는 우주적 형상에서 네 팔의 나라야나 형상으로, 그다음 두 팔의 원래 당신의 형상으로 모습을 바꾸셨다. 이것은 네 팔 형상은 물론 다른 베다에 언급된 여러 다른 형상도 모두 두 팔 형상의 원래 끄리쉬나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끄리쉬나가 모든 발산의 기원이다. 끄리쉬나는 이러한 여러 형상과 구분되며 비인성적 개념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끄리쉬나(끄리쉬나는 우주의 대양에 누워서 호흡을 통해 무수한 우주를 내놓고 들이마시는 마하 비쉬누로도 알려져 있다)와 가장 유사한 네 팔 형상도 지고한 주의 확장이라고 브라흐마 삼히따(5.48)에 명백히 언급된다.

야샤이까-니스바시따-깔람 아타발람뱌 yasyaika-niśvasita-kālam athāvalambya
지반띠 로마-빌라-자 자갇아난다-나타하 jīvanti loma-vila-jā jagad-aṇḍa-nāthāḥ
비쉬누르 마한 사 이하 야샤 깔라-비세쇼 viṣṇur mahān sa iha yasya kalā-viśeṣo
고빈담 아디-뿌르샴 땀 아함 바자미 govindam ādi-puruṣaṁ tam ahaṁ bhajāmi

“무수한 우주가 들어가고, 당신의 호흡으로 다시 무수한 우주가 생겨나게 하는 마하 비쉬누는 끄리쉬나의 전체적 확장입니다. 따라서 저는 고빈다, 모든 원인의 원인, 끄리쉬나를 숭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축복과 지식을 가진 최고인격신, 끄리쉬나의 인격적 형상을 숭배해야 한다. 당신은 모든 비쉬누 형상의 원천이고, 모든 형태의 화신이 생겨나게 한 원천이며, 바가바드 기따가 확증하는 것처럼 원초적 최고인격신이다.

베다 문헌(고빨라 따빠니 우빠니샤드 1.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삿-찓-아난다-루빠야 sac-cid-ānanda-rūpāya
끄리쉬나야끌리쉬따-까리네 kṛṣṇāyākliṣṭa-kāriṇe
나모 베단따-베댜야 namo vedānta-vedyāya
구라베 붇디-삭쉬네 gurave buddhi-sākṣiṇe

“저는 축복과 영원, 그리고 지식의 초월적 형상인 끄리쉬나께 존경의 경배를 올립니다. 끄리쉬나를 이해한다는 것은 베다를 이해하는 것이기에, 저는 그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그러므로 그는 최고의 영적 스승이십니다.” 그다음에 말하기를, “끄리쉬노 바이 빠라맘 다이바땀(kṛṣṇo vai paramaṁ daivatam), 끄리쉬나는 최고인격신이다(고빨라 따빠니 우빠니샤드 1.3).” 에꼬 바시 사르바-가 끄리쉬나 이댜하(Eko vaśī sarva-gaḥ kṛṣṇa īḍyaḥ), 그 한 분의 끄리쉬나가 최고인격신이며, 그가 숭배의 대상이다.” “에꼬삐 산 바후다 요 ‘바바띠(Eko ’pi san bahudhā yo ’vabhāti), 끄리쉬나는 하나이지만, 그는 무한한 형상과 화신으로 확장한다(고빨라 따빠니 우빠니샤드 1.21).”

브라흐마 삼히따(5.1)에서 말하기를,

이스바라 빠라마 끄리쉬나하 īśvaraḥ paramaḥ kṛṣṇaḥ
삿-찓-아난다-비그라하하 sac-cid-ānanda-vigrahaḥ
아나디르 아디르 고빈다하 anādir ādir govindaḥ
사르바-까라나-까라남 sarva-kāraṇa-kāraṇam

“최고인격신은 영원성과 지식, 축복의 몸을 가진 끄리쉬나다. 그에겐 시작이 없는데, 그는 모든 것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원인의 원인이다.”

또 다른 곳에서 말하기를, “야뜨라바띠르남 끄리쉬나캼 빠람 브라흐마 나라끄리띠(yatrāvatīrṇaṁ kṛṣṇākhyaṁ paraṁ brahma narākṛti), 지고의 절대 진리는 인격체이며, 그의 이름은 끄리쉬나이고, 그는 때때로 이 지상에 강림한다.” 스리마드 바가바땀에 이와 유사한 다양한 최고인격신의 화신에 관한 설명이 있으며, 그곳에 끄리쉬나의 이름 또한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난 끄리쉬나는 절대신의 화신이 아니라 원초적 최고인격신이시다(에떼 짬샤-깔라 뿜사 끄리쉬나스 뚜 바가반 스바얌(ete cāṁśa-kalāḥ puṁsaḥ kṛṣṇas tu bhagavān svayam).

마찬가지로 바가바드 기따에서도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맛따 빠라따람 난얏(mattaḥ parataraṁ nānyat), 인격신 끄리쉬나로서의 내 형상보다 더 뛰어난 것은 없느니라.” 바가바드 기따의 다른 곳에서 또한 말씀하시기를, “아함 아디르 히 데바남(aham ādir hi devānām), 나는 모든 데바의 기원이니라.” 그리고 아르주나는 끄리쉬나로부터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한 다음에 다음과 같이 확언했다. “빠람 브라흐마 빠람 다마 빠비뜨람 빠라맘 바반(paraṁ brahma paraṁ dhāma pavitraṁ paramaṁ bhavan), 이제 저는 당신이 최고인격신이고, 절대 진리이며, 모든 것의 안식처라는 사실을 완전히 이해합니다.” 그러므로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보여주신 우주적 형상은 절대신의 원래 모습이 아니다. 원초적 모습은 끄리쉬나의 모습이다. 수천 개의 머리와 손을 가진 우주적 형상은 절대신을 향한 사랑이 없는 자들의 주의를 끌기 위해 나타난 모습이다. 이것은 절대신의 원래 형상이 아니다.

우주적 형상은 주와 여러 가지 초월적 관계로 사랑에 빠져있는 순수한 헌애자에게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끄리쉬나와 우정으로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아르주나에게 이 우주적 현현으로서의 형상은 반갑지가 않다. 오히려 그것은 두렵다. 끄리쉬나와 항상 함께하는 아르주나는 초월적 눈을 가졌음에 틀림이 없었다.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우주적 형상에 매료되지 않았다. 이 형상은 결실적 행위로 자신의 영적 발전을 꾀하는 자들에게는 경이롭게 보일지 모르나, 봉헌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두 팔 형상의 끄리쉬나가 가장 소중한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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