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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옴 아갸나-띠미란다샤 oṁ ajñāna-timirāndhasya
갸난자나-샬라까야 jñānāñjana-śalākayā
짝슈르 운밀리땀 예나 cakṣur unmīlitaṁ yena
따스마이 스리-구라베 나마하 tasmai śrī-gurave namaḥ

스리-차이따냐-마노-비쉬땀 śrī-caitanya-mano-’bhīṣṭaṁ
스따삐땀 예나 부-딸레 sthāpitaṁ yena bhū-tale
스바얌 루빠 까다 마햠 svayaṁ rūpaḥ kadā mahyaṁ
다다띠 스바-빠단띠깜 dadāti sva-padāntikam

저는 암흑 같은 무지로 태어났으나 제 영적 스승께서 지식의 횃불로 제 눈을 밝혀 주셨습니다. 그런 영적 스승님께 경배합니다.

이 물질계 안에 주 차이따냐의 소망을 성취하기 위한 임무를 확립하신 스릴라 루빠 고스와미 쁘라부빠다(Śrīla Rūpa Gosvāmī Prabhupāda)께서는 언제 당신의 연꽃 같은 발아래 제가 은신하도록 허락하실까요?

반데’ 함 스리-구로 스리-유따-빠다- vande ’haṁ śrī-guroḥ śrī-yuta-pada-
까말람 스리-구룬 바이쉬나밤스 짜 kamalaṁ śrī-gurūn vaiṣṇavāṁś ca
스리-루빰 사그라자땀 사하-가나- śrī-rūpaṁ sāgrajātaṁ saha-gaṇa-
라구나탄비땀 땀 사-지밤 raghunāthānvitaṁ taṁ sa-jīvam
사드바이땀 사바두땀 빠리자나- sādvaitaṁ sāvadhūtaṁ parijana-
사히땀 끄리쉬나-차이따냐-데밤 sahitaṁ kṛṣṇa-caitanya-devaṁ
스리-라다-끄리쉬나-빠단 사하-가나- śrī-rādhā-kṛṣṇa-pādān saha-gaṇa-
랄리따-스리-비샤칸비땀스 짜 lalitā-śrī-viśākhānvitāṁś ca

제 영적 스승님의 연꽃 같은 발과 모든 바이쉬나바(Vaiṣṇavas)의 발에 경배합니다. 스릴라 루빠 고스와미와 함께 그의 형 사나따나 고스와미(Sanātana Gosvāmī), 그리고 라구나타 다사(Raghunātha Dāsa), 라구나타 밧따(Raghunātha Bhaṭṭa), 고빨라 밧따(Gopāla Bhaṭṭa)와 스릴라 지바 고스와미(Śrīla Jīva Gosvāmī)께도 경배합니다. 주 끄리쉬나 차이따냐(Lord Kṛṣṇa Caitanya)께 경배하며 주 니땨난다(Lord Nityānanda)와 아드바이따 아차리아(Advaita Ācārya), 가다다라(Gadādhara), 스리바사(Śrīvāsa)와 다른 동반자들께도 경배합니다. 그들의 동반자 스리 랄리따(Śrī Lalitā), 비샤카(Viśākhā)와 함께 스리마띠 라다라니(Śrīmatī Rādhārāṇī)와 스리 끄리쉬나(Śrī Kṛṣṇa)께 경배합니다.

헤 끄리쉬나 까루나-신도 he kṛṣṇa karuṇā-sindho
디나-반도 자갓-빠떼 dīna-bandho jagat-pate
고뻬샤 고삐까-깐따 gopeśa gopikā-kānta
라다-깐따 나모 스뚜 떼 rādhā-kānta namo ’stu te

오 나의 소중한 끄리쉬나시여! 당신은 괴로운 자들의 친구이며 창조의 근원입니다. 당신은 고삐들의 주인이시며 라다라니의 연인이십니다. 그런 당신께 경배합니다.

땁따-깐짜나-고랑기 tapta-kāñcana-gaurāṅgi
라데 브린다바네스바리 rādhe vṛndāvaneśvari
브리샤바누-수떼 데비 vṛṣabhānu-sute devi
쁘라나마미 하리 -쁘리예 praṇamāmi hari-priye

황금색 같은 피부를 한, 브린다반의 여왕 라다라니께 경배합니다. 당신은 브리샤바누 왕의 딸이며 주 끄리쉬나께 아주 소중한 존재이십니다.

반차-깔빠-따루뱌스 짜 vāñchā-kalpa-tarubhyaś ca
끄리빠-신두뱌 에바 짜 kṛpā-sindhubhya eva ca
빠띠따남 빠바네뵤 patitānāṁ pāvanebhyo
바이쉬나베뵤 나모 나마하 vaiṣṇavebhyo namo namaḥ

주의 모든 바이쉬나바 헌애자들께 경배합니다. 그들은 소망의 나무처럼 모든 이의 소망을 들어줄 수 있고 타락한 영혼들을 향한 동정심으로 가득합니다.

스리-끄리쉬나-차이따냐 쁘라부-니땨난다
śrī-kṛṣṇa-caitanya prabhu-nityānanda
스리-아드바이따 가다다라 스리바사디-고라-박따-브린다
śrī-advaita gadādhara śrīvāsādi-gaura-bhakta-vṛnda

스리 끄리쉬나 차이따냐, 쁘라부 니땨난다, 스리 아드바이따, 가다다라, 스리바사와 헌애의 계통에 있는 모든 분께 경배합니다.

하레 끄리쉬나 하레 끄리쉬나 끄리쉬나 끄리쉬나 하레 하레
hare kṛṣṇa hare kṛṣṇa kṛṣṇa kṛṣṇa hare hare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
hare rāma hare rāma rāma rāma hare hare

바가바드 기따는 기또빠니샤드(Gītopaniṣad)로 알려져 있다. 바가바드 기따는 베다 지식의 정수이며 베다 문헌에서 가장 중요한 우빠니샤드의 하나이다. 물론 바가바드 기따를 논평한 많은 영어판이 있고 또 다른 번역본이 필요한지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이 출판본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다. 최근 한 미국 여성이 나에게 바가바드 기따 영어 번역본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미국에는 영어로 읽을 수 있는 바가바드 기따 책이 많이 있지만 미국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도 내가 본 책들 어느 하나도 엄격히 권위 있다고 할 수 없다. 거의 모든 책이 바가바드 기따의 정신을 있는 그대로 전하지 않고 주석자 고유의 견해를 피력했기 때문이다.

바가바드 기따의 정신은 바가바드 기따 자체가 설명한다. 우리가 어떤 약을 먹으려면 그 약 봉투에 붙은 지시 사항을 따라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 마음대로 약을 먹거나 친구의 지시 사항을 따라서는 안 된다. 반드시 표지에 붙은 지시를 따르거나 약사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마찬가지로 바가바드 기따는 바가바드 기따를 말한 사람의 지시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바가바드 기따의 화자는 주 스리 끄리쉬나이다. 그는 바가바드 기따의 모든 장에서 최고인격신, “바가반(Bhagavān)”으로 불린다. 물론 바가반이라는 단어는 가끔 강력한 사람 혹은 강력한 하위신(demigod)을 의미하기도 하고 여기서 주 스리 끄리쉬나는 분명 강력한 인격(사람) 바가반으로 지칭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샹까라차리아(Śaṅkarācārya), 라마누자차리아(Rāmānujācārya), 마드바차리아(Madhvācārya), 님바르까 스와미(Nimbārka Svāmī), 스리 차이따냐 마하쁘라부와 같은 모든 위대한 아차리아(ācāryas 영적 스승)들과 인도 베다 지식의 다른 많은 권위자가 확증한 것처럼 주 스리 끄리쉬나가 최고인격신(Supreme Personality of Godhead)이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주 스스로 당신이 최고인격신임을 바가바드 기따 안에서 확립하셨고 브라흐마 삼히따(Brahma-saṁhitā)와 특히 바가바따 뿌라나(Bhāgavata Purāṇa)로 알려진 스리마드 바가바땀은 물론이고 모든 뿌라나에서 끄리쉬나를 최고인격신으로 인정한다 (끄리쉬나 뚜 바가반 스바얌 kṛṣṇas tu bhagavān svayam). 그러므로 최고인격신께서 직접 지도하시는 대로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해야 한다. 기따 제4장에서 끄리쉬나께서 말씀하신다(바가바드 기따 4.1~3).

이맘 비바스바떼 요감 imaṁ vivasvate yogaṁ
쁘록따반 아함 아뱌얌 proktavān aham avyayam
비바스반 마나베 쁘라하 vivasvān manave prāha
마누르 익쉬바까베 브라빗 manur ikṣvākave ’bravīt

에밤 빠람빠라-쁘랍땀 evaṁ paramparā-prāptam
이맘 라자르샤요 비두후 imaṁ rājarṣayo viduḥ
사 깔레네하 마하따 sa kāleneha mahatā
요고 나쉬따 빠란-따빠 yogo naṣṭaḥ paran-tapa

사 에바얌 마야 떼 댜 sa evāyaṁ mayā te ’dya
요가 쁘록따 뿌라따나하 yogaḥ proktaḥ purātanaḥ
박또 시 메 사카 쩨띠 bhakto ’si me sakhā ceti
라하샴 혜딷 웃따맘 rahasyaṁ hy etad uttamam

여기서 주는 아르주나에게 이 요가 체계, 바가바드 기따를 처음 태양신에게 말씀하셨고 태양신은 그것을 마누(Manu)에게, 마누는 익쉬바꾸(Ikṣvāku)에게 설명했고 이런 식으로 사제전수를 통해 한 화자에서 다른 화자로 이 요가 체계가 전해 내려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것이 사라졌다. 따라서 주께서 이를 다시 말씀하셔야 했고 이번에는 꾸룩쉐뜨라 전장에서 아르주나에게 말씀하신 것이다.

주께서 이 최고 비밀을 아르주나에게 알려주시는 이유는 그가 당신의 헌애자이자 친구이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바가바드 기따가 특별히 주의 헌애자를 위한 글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 세상에는 세 종류의 초월주의자가 있는데 이름하여 갸니(jñānī: 비인성주의자), 요기(yogi: 명상가), 그리고 박따(bhakta: 헌애자)이다. 여기서 주께서는 아르주나에게 오래된 계승이 끊어졌기 때문에 당신이 그를 새로운 빠람빠라(사제 전수)의 첫 전수자로 만드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태양신에게서 다른 이들로 전해 내려온 한결같은 사상을 또 다른 빠람빠라로 확립하시는 것은 주의 뜻이며 당신의 가르침이 아르주나에 의해 새로이 전해지는 것 또한 주의 뜻이었다. 주는 아르주나가 바가바드 기따 이해의 권위자가 되기를 원하셨다. 따라서 바가바드 기따가 아르주나에게 특별히 전해진 이유는 아르주나가 주의 헌애자이자 끄리쉬나를 바르게 이해하고자 하는 학생이며 주와 매우 가까운 친구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바가바드 기따는 아르주나와 유사한 자질을 지닌 사람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즉, 주와 직접적인 관계에 있는 헌애자여야 한다는 말이다. 누구라도 주의 헌애자가 되는 즉시 주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게 된다. 그것은 매우 정교한 주제이지만 간략히 말하자면 헌애자는 다섯 가지 형태 중 하나로 최고인격신과 관계를 맺는다.

1. 주와 수동적인 관계에 있는 헌애자가 될 수 있다.

2. 주와 능동적인 관계에 있는 헌애자가 될 수 있다.

3. 주의 친구로서 헌애자가 될 수 있다.

4. 주의 부모로서 헌애자가 될 수 있다.

5. 주의 연인/부부로서 헌애자가 될 수 있다.

아르주나는 주와 친구 관계였다. 물론 이 우정과 물질계에서 볼 수 있는 우정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이것은 초월적 우정으로, 모든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주와 특정한 관계를 맺고 있고 그 관계는 봉헌의 완성을 통해 되살아난다. 그러나 현재 우리 삶 속에서 우리는 주를 잊었을 뿐만 아니라 주와의 영원한 관계 또한 잊게 되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생명체 모두 각각 주와 영원히 특정한 관계를 맺는다. 그것을 스바루빠(svarūpa)라고 한다. 봉헌의 과정으로 누구나 그 스바루빠를 되살릴 수 있고 그 단계를 스바루빠-싣디(svarūpa-siddhi), 즉 생명체의 근원적 위치의 달성이라고 한다. 따라서 아르주나는 헌애자였고 주와 우정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아르주나가 이 바가바드 기따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그의 태도는 제10장에 나타난다 (바가바드 기따 10.12~14).

아르주나 우바짜 arjuna uvāca
빠람 브라흐마 빠람 다마 paraṁ brahma paraṁ dhāma
빠비뜨람 빠라맘 바반 pavitraṁ paramaṁ bhavān
뿌루샴 샤스바땀 디뱜 puruṣaṁ śāśvataṁ divyam

아디-데밤 아잠 비붐 ādi-devam ajaṁ vibhum
아후스 뜨밤 리샤야 사르베 āhus tvām ṛṣayaḥ sarve
데바르시르 나라다스 따타 devarṣir nāradas tathā
아시또 데발로 비아사하 asito devalo vyāsaḥ
스바얌 짜이바 브라비쉬 메 svayaṁ caiva bravīṣi me

사르밤 에딷 리땀 만예 sarvam etad ṛtaṁ manye
얀 맘 바다시 께샤바 yan māṁ vadasi keśava
나 히 떼 바가반 뱍띰 na hi te bhagavan vyaktiṁ
비두르 데바 나 다나바하 vidur devā na dānavāḥ

“아르주나가 말했습니다: 당신은 최고인격신이며, 궁극적 보금자리이고 가장 순수하며 절대 진리입니다. 당신은 영원하고 초월적이며 최초의 사람이며 태어나지 않은 분이며 가장 위대하십니다. 나라다, 아시따, 데발라 그리고 비아사 같이 위대한 모든 성인이 당신에 관한 이 진리를 확증하고, 이제 당신께서 친히 저에게 이것을 공언하고 계십니다. 오 끄리쉬나, 저는 당신께서 말씀하신 모든 것을 진리로 완전하게 받아들입니다. 오 주여, 데바들도 악마들도 당신의 인격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최고인격신에게서 바가바드 기따를 들은 후 아르주나는 끄리쉬나를 빠람 브라흐마, 즉 지고의 브라흐만(Supreme Brahman)으로 받아들였다. 모든 생명체는 브라흐만이지만 최고의 생명체, 즉 최고인격신은 최고의 브라흐만이다. 빠람 다마는 그가 최상의 안식처 혹은 모든 것의 보금자리라는 뜻이다. 빠비뜨람은 그가 물질적 오염에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존재임을 의미하고 뿌루샴은 그가 최고의 향유자, 샤스바땀은 영원하며 디뱜은 초월적이며 아디-데밤은 근원적 최고인격신, 아잠은 태어나지 않은, 그리고 비붐은 가장 위대함을 의미한다.

이제 끄리쉬나가 아르주나의 친구였기 때문에 아르주나가 그에게 아부하려고 이 모든 것을 말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바가바드 기따 독자들의 마음속 의심을 없애기 위해 아르주나는 자기뿐만 아니라 나라다, 아시따, 데발라, 비아사데바 같은 권위자들 또한 끄리쉬나를 최고인격신으로 받아들였다고 다음 구절에서 이런 찬양을 입증한다. 이들은 베다 지식을 있는 그대로 전파한 위대한 인물들로, 다른 모든 아차리아의 지지를 받는다. 그러므로 아르주나는 끄리쉬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든 전적으로 완벽한 것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사르밤 에딷 리땀 만예. “당신이 하시는 모든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입니다.” 아르주나는 또한 주의 인격은 이해하기 매우 어렵고 위대한 데바들조차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말은 인간보다 더 위대한 존재들조차 주를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주의 헌애자가 되지 않고서 인간이 주 스리 끄리쉬나를 이해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헌애(獻愛, devotion)의 정신으로 바가바드 기따를 받아들여야 한다. 끄리쉬나와 자기가 동등하거나 끄리쉬나가 평범한 사람이거나 혹은 매우 위대한 인물이라고조차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 스리 끄리쉬나는 최고인격신이다. 그래서 바가바드 기따의 말씀 혹은 아르주나의 진술에 따라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은 적어도 이론적으로나마 스리 끄리쉬나를 최고인격신으로 받아들여야 하고 그런 순종적인 마음가짐으로 우리는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할 수 있다. 바가바드 기따는 위대한 불가사의이므로 순종하는 정신 없이 바가바드 기따를 읽으면 이것을 이해하기란 몹시 어렵다. 

그렇다면 바가바드 기따란 무엇인가? 바가바드 기따의 목적은 인류를 물질적 존재의 무지에서 구하는 것이다. 아르주나 역시 꾸룩쉐뜨라 전장에서 싸워야 하는 어려움에 부닥쳤던 것처럼 모든 인간은 여러 가지 곤경에 빠진다. 아르주나는 스리 끄리쉬나께 항복했고,그 결과 바가바드 기따가 설해졌다. 아르주나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이 물질적 존재 탓에 무수한 불안과 근심에 사로잡힌다. 우리 존재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환경 속에 놓여 있다. 사실 우리는 존재하지 않음에 두려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우리의 존재는 영원하다. 그러나 어떤 연유로 우리는 아삿(asat)에 놓이게 되었다. 아삿은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괴로워하는 수많은 사람 중에 오직 몇 명만이 실제로 나는 누구이고 왜 이런 곤경에 빠지는지, 자기 위치에 관해 질문한다. 자기가 겪는 괴로움을 묻는 단계에 이를 만큼 깨어 있지 않은 한, 고통을 겪고 싶지 않은 마음을 뛰어넘어 이 모든 고통의 해결책을 찾고 싶다고 깨닫지 않는 한, 완벽한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질문이 우리 마음속에 일어날 때 인류가 시작된다. 브라흐마 수뜨라 (Brahma-sūtra)에서 이런 질문을 브라흐마 지갸사(brahma-jijñāsā)라고 한다. 아타또 브라흐마 지갸사. 절대자의 본성에 관해 질문하지 않는다면 인간의 어떤 행위도 실패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므로 우리가 왜 고통을 겪는지, 어디에서 와서 죽은 뒤 어디로 가는지를 질문하기 시작하는 사람은 바가바드 기따를 이해하기에 적합한 학생이다. 진지한 학생은 또한 최고인격신을 향한 확고한 존경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학생이 아르주나였다.

주 끄리쉬나는 인간이 삶의 진정한 목적을 잃어버리면 그것을 재확립하기 위해 특별히 강림하신다. 깨어 있는 수많은 인간 중 실제로 자기 위치를 이해할 수 있는 정신을 가진 자는 매우 드물고 그런 자에게 바가바드 기따가 설해진다. 실제로 우리는 모두 무지 속에 갇혀 있지만, 주께서 생명체, 특히 인간에게 큰 자비를 베푸시어 친구 아르주나를 학생으로 삼아 바가바드 기따를 말씀하셨다.

주 끄리쉬나의 친구로서 아르주나는 모든 무지에서 벗어나 있었지만 그가 주 끄리쉬나께 삶의 제 문제에 관해 질문하고 주께서 인류의 장래 세대들을 위해 이 모든 것과 그 해결책을 설명하시고자 꾸룩쉐뜨라 전장에서 아르주나를 무지에 빠뜨리셨다. 이로써 인간이 바르게 행동하고 인간 삶의 임무를 완성할 수 있게 된다.

바가바드 기따의 주제는 다섯 가지 기본 진리에 관한 이해를 다룬다. 먼저 절대신의 과학에 관한 모든 것이 설명되고 생명체, 지바(jīvas)의 근원적 위치가 설명된다. 통제자를 뜻하는 이스바라(īśvara)가 있고 통제되는 생명체, 지바가 존재한다. 만일 생명체가 통제를 받지 않고 자유롭다고 말한다면 그 사람은 정상이 아니다. 생명체는 적어도 속박된 삶 속에서 매 순간 통제받는다. 그래서 바가바드 기따의 주제로 최고의 통제자 이스바라와 통제되는 생명체 지바를 다룬다. 쁘라끄리띠(Prakṛti 물질적 본성)와 시간(전 우주가 존재하는 기간 혹은 물질적 본성의 발현), 까르마(행위) 또한 논의된다. 우주의 발현은 다양한 행위들로 가득하다. 모든 생명체는 다양한 행위를 하고 있다.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 절대신이 무엇인지, 생명체는 무엇인지, 쁘라끄리띠는 무엇인지, 우주의 발현은 무엇인지, 시간에 의해 어떻게 통제되는지, 그리고 생명체의 행위는 무엇인지에 대해 반드시 배워야 한다.

이 다섯 가지 기본 주제 중 최고인격신, 혹은 끄리쉬나, 혹은 브라흐만, 혹은 최고 통제자, 혹은 빠람아뜨마(Paramātmā), 어떤 이름으로 부르든, 이것이 모든 것 중 가장 위대하다고 바가바드 기따는 확립한다. 생명체는 질적으로 지고한 통제자와 비슷하다. 바가바드 기따의 후반부에 설명될 것이지만, 예를 들면, 주는 물질적 본성의 모든 우주적 문제를 통제하신다. 물질적 본성은 독립된 존재가 아니다. 그것은 지고한 주의 지시에 따라 움직인다. 주 끄리쉬나께서 마야댝쉐나 쁘라끄리띠 수야떼 사-짜라짜람(mayādhyakṣeṇa prakṛtiḥ sūyate sa-carācaram), “이 물질적 본성은 내 지시로 움직이고 있다.”라고 말씀하신다. 우주의 경이로움을 목격할 때 이 우주적 발현 뒤에 통제자가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통제 없이 발현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통제자를 고려하지 않는 것은 유치한 생각이다. 예를 들어 아이는 말이나 다른 동물이 끌지 않고도 자동차가 달리는 것이 굉장히 신기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면 자동차의 기계적 구조와 그 특성을 알고 기계 뒤에 운전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지고한 주가 운전자이고 당신의 지시로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다. 지바, 즉 생명체는 후반부에 설명되겠지만, 주께서 당신의 부분으로 받아들이셨다. 금의 부분 역시 금이고 바다의 물 한 방울 역시 짠 것처럼 우리 생명체는 최고 통제자 이스바라, 혹은 바가반, 주 끄리쉬나의 한 부분으로서 지고한 주가 지니신 모든 자질을 극소량 지니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아주 작은, 종속된 이스바라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현재 우주 혹은 행성과 같은 자연을 정복하려고 애쓰고 있고 이런 통제하려는 경향은 바로 끄리쉬나 또한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물질적 본성을 다스리려는 경향이 있더라도 우리는 지고한 통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바가바드 기따가 설명한다.

물질적 본성은 무엇인가? 이것 또한 기따에서 하위 쁘라끄리띠, 하위 본성으로 설명된다. 생명체는 상위 쁘라끄리띠로 설명된다. 쁘라끄리띠는 상위이든 하위이든 항상 통제를 받는다. 쁘라끄리띠는 여성이고, 아내가 남편의 통제를 받듯, 쁘라끄리띠는 주의 통제를 받는다. 쁘라끄리띠는 항상 종속적이고 주의 지배를 받는다. 생명체와 물질적 본성 모두 지고한 주께 지배받고 통제당한다. 기따에 따르면 생명체는 비록 지고한 주의 부분이지만 쁘라끄리띠로 간주한다. 이것은 바가바드 기따의 제7장에 분명히 언급된다. 아빠레얌 이따스 뜨반얌 쁘라끄리띰 빋디 메 빠람/ 지바-부땀(Apareyam itas tv anyāṁ prakṛtiṁ viddhi me parām/ jīva-bhūtām), “이 물질적 본성은 내 하위 쁘라끄리띠이지만 이것을 넘어서 쁘라끄리띠 지바-부땀, 즉 생명체가 존재한다.”

물질적 본성 그 자체는 세 가지 자질, 즉 선성(mode of goodness), 동성(mode of passion), 암성(mode of ignorance)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을 초월해 영원한 시간이 존재하고 이 본성들이 섞이고 통제를 받고 영원한 시간의 범위 안에서 행위가 이루어질 때 이를 까르마라고 한다. 이 행위들은 태곳적부터 시작되었고 우리는 우리 행위의 결과로 고통받거나 즐거워하고 있다. 예를 들어 내가 사업가이고 좋은 사업 수완으로 열심히 일해 많은 돈을 모았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나는 즐기는 자이다. 하지만 사업으로 모든 돈을 다 잃었다고 하면 나는 괴로운 자이다. 마찬가지로 삶의 모든 면에서 우리는 우리가 한 일의 결과를 즐기거나 괴로워한다. 이것을 까르마라고 한다.

이스바라(지고한 주), 지바(생명체), 쁘라끄리띠(자연), 깔라(영원한 시간), 까르마(행위)는 모두 바가바드 기따에 설명되어 있다. 이 다섯 가지 중 주, 생명체, 물질적 본성, 시간은 영원하다. 쁘라끄리띠의 발현은 일시적이지만 거짓이 아니다. 어떤 철학자들은 물질적 본성이 거짓이라고 하지만 바가바드 기따의 철학 혹은 바이쉬나바의 철학에 따르면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세상의 나타남(발현)을 거짓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이것은 일시적이다. 이는 마치 하늘에 떠도는 구름 혹은 곡식을 살찌우는 우기의 도래와 유사하다. 우기가 끝나고 구름이 걷히자마자 비로 영양분을 공급받은 모든 작물이 마른다. 마찬가지로 물질적 발현은 특정한 주기에 따라 일어나고 얼마간 머무르다 사라진다. 이것이 쁘라끄리띠가 작용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순환이 영원히 작용한다. 그러므로 쁘라끄리띠는 영원하다. 거짓이 아니다. 주는 이것을 “나의 쁘라끄리띠.”라고 말씀하신다. 이 물질적 본성은 지고한 주의 분리된 에너지이고, 마찬가지로 생명체 또한 지고한 주의 에너지이지만 분리되어 있지 않고 영원히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주, 생명체, 물질적 본성과 시간은 상호 연관되어 있으며 모두 영원하다. 그러나 까르마는 영원하지 않다. 까르마의 영향이 매우 오래 갈 수도 있다. 태곳적부터 우리는 우리 행위의 결과로 고통받거나 즐기고 있지만 우리 까르마, 우리 행위의 결과는 바뀔 수 있고 이 변화는 우리가 완벽한 지식을 갖추는 데 달려있다. 우리는 다양한 행위를 한다. 우리는 어떠한 행위를 해야 행위의 작용과 반작용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명백히 알지 못하지만 바가바드 기따에 이것 또한 설명되어 있다.

이스바라, 지고한 주의 위치는 지고한 의식이다. 지바, 즉 생명체 또한 지고한 주의 부분으로서 의식이 있다. 생명체와 물질적 본성 둘 다 쁘라끄리띠, 지고한 주의 에너지로 설명되지만 둘 중 지바만 의식이 있고 쁘라끄리띠는 의식이 없다. 그것이 다른 점이다. 그러므로 주와 비슷하게 지바도 의식을 가지므로 지바-쁘라끄리띠는 상위라고 불린다. 주의 의식은 최고 의식이지만 지바, 즉 생명체 또한 최상의 의식을 지녔다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생명체가 완성의 길을 가는 어떠한 단계에서도 최상의 의식을 가질 수는 없고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하는 이론은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하는 이론이다. 의식이 있지만 그 의식은 완벽하거나 최상의 의식이 아니다.

지바와 이스바라의 구별은 바가바드 기따의 제13장에 설명될 것이다. 주와 생명체 모두 의식이 있지만 생명체는 자기의 특정한 몸에 대해서만 의식하는 반면, 주는 끄쉐뜨라-갸(kṣetra-jña) 모든 몸에 관해 의식을 갖고 계신다. 주가 모든 생명체의 가슴속에 살고 계시기에 특정한 지바의 심적 움직임을 의식하신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빠람아뜨마, 최고인격신은 모든 이의 가슴속에 이스바라, 즉 통제자로 살고 계시고 생명체가 원하는 대로 행동하도록 인도하신다고도 설명되어 있다. 생명체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잊고 있다. 생명체는 먼저 어떤 식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결정한 다음 자기가 만들어낸 까르마의 작용과 반작용에 얽매인다. 옷을 벗고 입듯이 생명체는 한 형태의 몸을 버린 후 다른 형태의 몸에 들어간다. 영혼이 이렇게 옮겨 다니며 자기의 지난 행위들의 작용과 반작용으로 고통받는다. 이런 까르마는 생명체가 선성에 있을 때, 온전한 정신 상태에 있을 때, 그리고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지 이해할 때 바뀔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지난 행위의 모든 작용과 반작용을 바꿀 수 있다. 결과적으로 까르마는 영원하지 않다. 그러므로 다섯 항목(이스바라, 지바, 쁘라끄리띠, 시간, 까르마) 중 네 가지는 영원하지만 까르마는 영원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주의 의식과 생명체의 의식 둘 다 초월적이고, 최고의 의식 이스바라는 이런 점에서 생명체와 비슷하다. 물질의 조합으로 의식이 발생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 의식이 생겨난다는 이론은 바가바드 기따에서 부정된다. 빛이 색유리를 통과하면 특정한 색으로 보이는 것처럼 의식이 물질적 상황이라는 덮개에 의해 왜곡되게 투영될 수 있지만 주의 의식은 물질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주 끄리쉬나께서 “마야댝쉐나 쁘라끄리띠.”라고 하신다. 주께서 물질계에 내려오실 때 주의 의식은 물질적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면 바가바드 기따를 통해 초월적 주제에 관해 말할 자격이 없을 것이다. 물질적으로 오염된 의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않고 초월적 세계에 관해 어떤 것도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주는 물질적으로 오염되어 있지 않다. 우리 의식은 현재 물질적으로 오염되어 있다. 바가바드 기따는 이 물질적으로 오염된 의식을 정화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순수한 의식에서 우리의 행위는 이스바라의 의지와 긴밀한 연관을 맺고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한다. 우리의 모든 행위를 멈춰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반대로 우리의 행위를 정화해야 하고 정화된 행위를 박띠(bhakti)라고 한다. 박띠의 행위들이 평범한 행위처럼 보일지라도 이 행위들은 오염되지 않았다. 무지한 사람들은 헌애자가 평범한 사람처럼 행동하거나 일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러한 지식이 부족한 자는 헌애자나 주의 행위는 불결한 의식이나 물질로 오염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이런 행위는 세 가지 물질적 본성을 초월한다. 그러나 현재 우리 의식은 오염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물질적으로 오염되어 있을 때 "속박되어 있다"라고 한다. 거짓 의식은 내가 물질적 본성의 산물이라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이것을 "거짓 자아"라고 한다. 육체적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은 자기 처지를 이해할 수 없다. 바가바드 기따는 육체적 개념의 삶에서 인간을 해방하기 위해 설해졌고 이 정보를 주께 받기 위해 아르주나는 이러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우리는 육체적 개념의 삶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이 초월주의자의 예비 행위이다. 자유로워지고 싶은 사람, 해방을 얻고 싶은 사람은 반드시 자기가 이 물질적 육신이 아니라는 것부터 배워야 한다. 묵띠(Mukti), 즉 해방은 물질적 의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스리마드 바가바땀 또한 해방의 정의를 제공한다. 묵띠르 히뜨반야타-루빰 스바루뻬나 뱌바스티띠히(Muktir hitvānyathā-rūpaṁ svarūpeṇa vyavasthitiḥ). 묵띠는 이 물질계의 오염된 의식에서 해방되어 순수한 의식에 위치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가바드 기따의 모든 가르침은 이 순수한 의식을 일깨우기 위함이고 그 가르침의 마지막 단계에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이제 그가 순수한 의식의 상태에 있게 되었는지 물으신다. 순수한 의식은 주의 가르침에 맞게 행동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정화된 의식의 완전한 개요이자 본질이다. 우리는 주의 부분이므로 이미 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하위 물질적 본성에도 이끌린다. 그러나 주는 지고한 존재이기에 이런 것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것이 지고한 주와 작은 개별 영혼의 차이점이다.

그렇다면 이 의식이란 무엇인가? 이 의식은 “나이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 오염된 의식 안에서 “나”는 “내가 바라보는 모든 것의 주인이며 즐기는 자이다.” 세상이 돌고 도는 이유는 모든 생명체가 자기가 주인이고 물질계의 창조자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질적 의식은 두 가지 정신적 범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내가 창조자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즐기는 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지고한 주만이 창조자이자 향유자이며 지고한 주의 부분인 생명체는 창조자도 향유자도 아니라 협력자일 뿐이다. 생명체는 창조된 존재이며 즐겨지는 존재이다. 예를 들면 기계의 부품은 기계 전체에 협력하고 몸의 부분은 몸 전체에 협력한다. 손, 다리, 눈 등은 몸 전체의 부분이지만 이 부분들이 즐기는 주체는 아니다. 위장이 즐기는 주체이다. 다리가 움직이고 손이 음식을 입에 넣고 치아가 씹으며 몸의 모든 부분이 위장을 만족시키려고 움직인다. 위장이 신체 조직에 영양을 공급하는 주된 기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위장에 공급된다. 나무의 뿌리에 물을 줌으로써 영양을 공급하듯이 위장에 음식을 공급함으로써 몸을 유지할 수 있다.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려면 몸의 부분들이 협력하여 위장을 먹여 살려야 한다. 마찬가지로 지고한 주가 향유자이고 창조자이므로 종속된 우리 생명체는 주를 만족시키는 데 협력하기 위해 존재한다. 위장이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몸 전체의 각 부분을 돕는 것처럼 이 협력이 실제로 우리를 도울 것이다. 손가락이 위장에 음식을 주는 대신 스스로 음식을 먹으려고 하면 좌절하고 말 것이다. 창조와 즐거움의 중심은 지고한 주이고 생명체는 협력자이다. 협력함으로써 생명체도 즐거움을 누린다. 이 관계는 주인과 종의 관계와 마찬가지다. 주인이 완전히 만족하면 종도 만족한다. 마찬가지로 지고한 주가 만족해야 한다. 생명체도 창조자가 되고 물질계를 즐기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발현된 우주를 창조하신 지고한 주께 이러한 경향이 있기 때문에 생명체에게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바가바드 기따 안에서 완전한 전체가 지고한 통제자, 통제받는 생명체, 우주의 발현, 영원한 시간과 까르마(행위)로 이루어져 있고 이 모든 것이 설명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완전체를 구성하고 그 완전체를 “지고의 절대 진리”라고 부른다. 완전체와 완전한 절대 진리는 완전한 인격신, 스리 끄리쉬나이다. 모든 현상의 발현은 끄리쉬나의 서로 다른 에너지 때문이다. 끄리쉬나가 완전체이다.

비인성적 브라흐만 또한 완전한 지고한 인간에게 종속된다고도 기따가 설명한다(브라흐마노 히 쁘라띠쉬타함). 브라흐만은 태양의 빛과 같다고 브라흐마 수뜨라에 더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비인성적 브라흐만은 최고인격신의 빛나는 광채이다. 비인성적 브라흐만은 절대적 전체의 불완전한 깨달음이며 빠람아뜨마 개념 또한 마찬가지이다. 제15장에서 최고인격신, 뿌루숏따마(Puruṣottama)가 비인성적 브라흐만과 부분적 깨달음인 빠람아뜨마 둘 다 초월한다고 설명한다. 최고인격신은 삿 칫 아난다 비그라하(sac-cid-ānanda-vigraha)이다. 브라흐마 삼히따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스바라 빠라마 끄리쉬나 삿 칫 아난다 비그라하 / 아나디르 아디르 고빈다 사르바 까라나 까라남(īśvaraḥ paramaḥ kṛṣṇaḥ sac-cid-ānanda-vigrahaḥ/ anādir ādir govindaḥ sarva-kāraṇa-kāraṇam). “고빈다, 끄리쉬나는 모든 원인의 원인입니다. 당신은 최초의 원인이며 영원과 지식, 행복 그 자체입니다.” 비인성적 브라흐만 깨달음은 주의 삿(영원함) 특징을 깨달은 것이다. 빠람아뜨마 깨달음은 삿과 칫(영원한 지식)을 깨달은 것이다. 그러나 최고인격신 끄리쉬나에 관한 깨달음은 모든 초월적 특징, 삿, 칫, 아난다(영원함, 지식, 행복)의 완전한 비그라하(형상)를 깨닫는 것이다.

지성이 부족한 사람들은 최고 진리가 비인성적이라고 여기지만, 주는 초월적 인성이며 이것은 모든 베다 문헌이 확증한다(니뚀 니땨남 쩨따나스 쩨따나남, 『까타 우빠니샤드 2.2.13』). 우리 모두 개별 생명체이며 우리가 고유한 개성을 지니는 것처럼 지고의 절대 진리 역시 궁극적인 측면에서 볼 때 사람이며, 최고인격신에 관한 깨달음은 주의 완전한 형상이 지니는 모든 초월적 특징을 깨달은 것이다. 완전체는 무형이 아니다. 주가 형태가 없다면 혹은 주가 다른 것보다 못하다면 주를 완전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완전체는 반드시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과 그것을 초월하는 모든 것을 지녀야 하며 그렇지 않다면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완전체, 최고인격신은 무한한 능력을 지닌다(빠라샤 샥띠르 비비다이바 스루야떼 parāsya śaktir vividhaiva śrūyate). 끄리쉬나가 어떻게 다양한 능력을 보이시는지 또한 바가바드 기따가 설명한다. 상꺄(Sāṅkhya) 철학에 따르면 우리가 사는 현상계, 즉 감지할 수 있는 이 물질계 역시 그 자체로 완전하며 이 물질계는 24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일시적인 발현으로 이 우주의 유지와 지탱에 필요한 자원이 완전하게 생성되도록 설계되었다고 한다. 이 우주에는 불필요한 것도 부족한 것도 없다. 이 발현은 지고한 전체의 에너지에 의해 일정 시간 동안 지속하게 되어있고 그 시간이 다하면 일시적 발현은 완전체의 완전한 절차에 의해 소멸하게 된다. 작은 완전한 개체, 이름하여 인간에게는 완전체를 깨달을 수 있도록 완전한 편의가 주어졌지만 그런데도 온갖 종류의 불완전함을 경험하는 이유는 완전체에 관한 불완전한 지식 탓이다. 그래서 바가바드 기따는 베다 지혜에 관한 완전한 지식을 담고 있다.

모든 베다 지식은 어떤 오류도 없기 때문에 인도인들은 베다 지식을 완전하고 어떤 오류도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예를 들어 소똥은 동물의 변이고, 스므리띠(smṛti) 혹은 베다 가르침에 따르면 동물의 변을 만지면 정화를 위해 목욕해야 한다. 그러나 베다 경전들은 소똥이 정화제라고도 여긴다. 이것을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베다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이 사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실제로 그렇게 함으로써 실수를 저지르지 않게 된다. 이후 현대 과학이 소똥에 방부제 성분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베다 지식은 모든 의심과 실수를 넘어서기 때문에 완전하고 바가바드 기따는 모든 베다 지식의 핵심이다.

베다 지식은 연구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감각을 사용해 연구하기 때문에 우리가 하는 연구는 불완전하다. 바가바드 기따가 말하는 것처럼 빠람빠라를 통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완전한 지식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최고의 영적 스승, 주에서부터 시작되어 여러 영적 스승에게 전해져 내려온 사제전수라는 올바른 출처를 통해 지식을 받아야 한다. 아르주나는 주 스리 끄리쉬나께 가르침을 받았고 주가 하시는 모든 말씀에 이의 없이 그대로 받아들였다. 바가바드 기따의 어떤 부분은 받아들이면서 다른 부분은 거부해서는 안 된다.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바가바드 기따를 해석하지 않아야 하고 어떤 부분을 빠뜨리거나 혹은 개인적 의견을 부가해서는 안 된다. 기따를 가장 완벽한 베다 지식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베다 지식은 초월적 원천에서 나왔고 그 첫 마디는 주께서 직접 말씀하셨다. 주의 말씀을 아빠우루쉐야(apauruṣeya)라고 하고, 이것은 네 가지 결함을 지닌 속세의 사람들이 하는 말과 다르다는 뜻이다. 속세인은 (1) 반드시 실수를 범한다 (2) 항상 착각한다 (3) 다른 사람을 속이려는 경향이 있다 (4) 불완전한 감각의 제한을 받는다. 이 네 가지 불완전함 때문에 인간은 모든 분야의 지식을 완벽하게 전달할 수 없다.

베다 지식은 그런 결함 있는 생명체에 의해 전해진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처음으로 창조된 생명체 브라흐마(Brahmā)의 가슴속에 전해졌고 브라흐마는 주로부터 전해 받은 이 지식을 자기 아들과 제자들에게 전수했다. 주는 뿌르남(pūrṇam), 즉 전적으로 완벽하고 물질적 본성의 법칙에 종속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가 만물의 유일한 소유주이고, 주가 원초적 창조주이며 브라흐마의 창조자라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지성을 갖추어야 한다. 제11장에서 주는 쁘라삐따마하(prapitāmaha)로 불리는데, 브라흐마가 삐따마하, 즉 할아버지이고, 주는 할아버지의 창조자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누구도 어떤 것의 소유주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우리 육신의 유지를 위해 주께서 각자의 몫으로 정해주신 것만 받아들여야 한다.

주께서 정해주신 각자의 몫을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에 관한 예가 많이 있다. 이것 또한 바가바드 기따 안에 들어 있다. 초반부에 아르주나는 꾸룩쉐뜨라 전장에서 싸워서는 안 된다고 결정한다. 그것은 그가 스스로 정한 것이었다. 아르주나는 주께 자기 친척들을 죽이고 얻은 왕국을 즐길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육신이 자기이고 자기 육신과 관련된 사람들 혹은 육신의 확장이 자기 형, 조카, 매형, 할아버지 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이 결정은 육신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육신이 요구하는 바를 충족시키려 했다. 바로 이러한 관점을 바꾸려고 주께서 바가바드 기따를 말씀하셨고 마지막에 아르주나는 주의 지시에 따라 싸우기로 하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까리쉐 바짜남 따바(kariṣye vacanaṁ tava). “당신의 말씀대로 행동하겠습니다.”

인간은 개와 고양이처럼 다투려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인간으로 태어난 삶의 중요성을 깨닫고 평범한 동물과 같은 행동을 거부할 만큼의 지성을 갖추어야 한다. 인간은 삶의 목적을 깨달아야 하고 이 가르침은 모든 베다 문헌이 제공하며 그것의 핵심은 바가바드 기따에 들어 있다. 베다 문헌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지 동물을 위한 것이 아니다. 동물은 다른 동물을 죽일 수 있고 그런 행동이 죄가 되지 않지만 인간이 자기의 통제되지 않은 식욕을 위해 동물을 죽이면 자연의 법칙을 깨뜨린 데 대한 책임을 반드시 져야 한다. 바가바드 기따는 서로 다른 물질적 본성에 따라 행해지는 세 가지 행위, 즉 선성, 동성, 암성의 행위가 있다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음식도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선성에 있는 음식, 동성에 있는 음식, 그리고 암성에 있는 음식. 이 모든 것이 바가바드 기따에 분명히 설명되어 있고 우리가 기따의 가르침을 올바로 활용한다면 우리 삶 전체가 정화될 것이고 결국 이 물질적 세계를 넘어서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목적지를 사나따나(sanātana) 세계, 즉 영원한 영적 세계라고 한다(얃 가뜨바 나 니바르딴떼 딷 다마 빠라맘 마마 yad gatvā na nivartante tad dhāma paramaṁ mama). 이 물질계에서는 모든 것이 일시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어나서 잠시 머물다가 부산물을 만들고 쇠퇴한 다음 사라진다. 이 몸을 예로 들든 과일이나 다른 어떤 것을 예로 들든 그것이 물질계의 법칙이다. 그러나 이 일시적 세계를 넘어선 곳에 또 다른 세계가 존재하고 우리는 이것에 관한 정보를 가지고 있다. 그 세계는 또 다른 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은 사나따나, 즉 영원하다. 지바 또한 사나따나, 즉 영원하다고 설명되고 주 또한 사나따나라고 제11장에 명시된다. 우리는 주와 질적으로 하나이기 때문에 사나따나-다마(영원한 세계)와 사나따나 최고인격신, 그리고 사나따나 생명체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바가바드 기따의 주목적은 우리의 사나따나 업무, 즉 생명체의 영원한 업무인 사나따나 다르마(sanātana-dharma)를 일깨우는 데 있다. 우리는 일시적으로 여러 다양한 행위를 하고 있지만 이 모든 행위를 버리고 지고한 주께서 지시하신 행위를 시작하면 이 모든 행위가 정화된다. 그것을 순수한 삶이라고 한다.

주와 주의 초월적 보금자리는 둘 다 사나따나이고 생명체 역시 그러하며 주와 생명체가 사나따나 보금자리에 함께하게 되는 것이 인간 삶의 완성이다. 생명체는 주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주는 생명체에게 매우 자비로우시다. 주 끄리쉬나께서 바가바드 기따에서 사르바-요니슈… 아함 비자-쁘라다 삐따(sarva-yoniṣu … ahaṁ bīja-pradaḥ pitā), “나는 모두의 아버지이다.”라고 선언하신다. 물론 각자의 까르마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생명체가 있지만 주는 이 모두의 아버지라고 주장하신다. 그러므로 이 모든 타락하고 속박된 영혼을 교화하여 사나따나, 영원한 세계로 다시 불러들이고 사나따나 생명체가 그들의 영원한 사나따나 위치를 되찾아 주와 함께 영원히 지낼 수 있게 하시고자 주께서 강림하신다. 주는 속박된 영혼들을 교화하시려고 다양한 화신으로 직접 오시기도 하고 주의 은밀한 종들을 아들이나 주의 동반자, 아차리아의 모습으로 보내시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나따나 다르마는 파벌적 종교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영원한 생명체가 영원한 주와 관계를 맺는 영원한 기능이다. 사나따나 다르마는 앞서 설명한 것처럼 생명체의 영원한 업무를 의미한다. 스리빠다 라마누자차리아(Śrīpāda Rāmānujācārya)는 “사나따나”라는 단어를 “시작도 끝도 없는”이라고 설명했으므로 사나따나 다르마를 말할 때 스리빠다 라마누자차리아의 권위에 따라 시작도 끝도 없는 업무라고 해야 한다.

영어 단어 religion(종교)은 사나따나 다르마와는 조금 다르다. 종교는 믿음을 뜻하고 믿음은 바뀔 수 있다. 우리는 어떤 종교를 믿다가 믿음을 바꿔 다른 종교를 택할 수도 있지만 사나따나 다르마는 바뀔 수 없는 행위를 의미한다. 예를 들면, 액체는 물에서 분리될 수 없고 열은 불과 분리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체의 기능은 생명체와 떼어놓을 수 없다. 사나따나 다르마는 생명체와 영원히 함께 간다. 그러므로 사나따나 다르마를 말할 때 우리는 시작도 끝도 없다는 스리빠다 라마누자차리아의 권위 있는 설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시작도 끝도 없는 것이 종파적일 리 만무하다. 종파적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나따나 다르마 또한 종파적이라고 잘못 생각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이 주제를 깊이 있게 파헤치고 현대 과학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사나따나 다르마가 세계의 모든 사람, 우주의 모든 생명체의 업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사나따나가 아닌 종교적 믿음은 인류 역사에서 어떤 출발점이 있지만 사나따나 다르마는 생명체와 영원히 함께 존재하기 때문에 그 역사에 출발점이 없다. 생명체에 관한 한, 권위 있는 베다 문헌이 말하기를 생명체는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다고 한다. 생명체는 영원하고 파괴될 수 없으며 일시적 육신이 없어진 후에도 계속해서 산다. 사나따나 다르마의 개념을 논할 때 산스끄리뜨어 어근에서 종교의 개념을 이해해야 한다. 다르마는 특정한 대상과 함께 계속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불은 열과 빛으로 이루어져 있고 열과 빛없이 불이라는 단어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생명체와 항상 함께하는 부분, 생명체의 핵심이 되는 부분을 찾아야 한다. 항상 함께하는 것이 생명체의 영원한 특성이고, 그 영원한 특성이 영원한 종교이다.

사나따나 고스와미께서 스리 차이따냐 마하쁘라부께 모든 생명체의 스바루빠에 관해 질문했을 때, 주는 생명체의 스바루빠, 즉 타고난(근원적) 위치는 최고인격신께 봉사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주 차이따냐의 이 말씀을 분석하면 모든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에 지속해서 봉사하고 있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생명체는 다양한 능력을 활용해 다른 생명체를 섬긴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명체는 삶을 즐긴다. 더 낮은 동물은 종이 주인을 섬기듯 인간을 섬긴다. A가 B 주인을, B가 C 주인을, C가 D 주인을, 이런 식으로 봉사는 계속된다. 한 친구가 다른 친구를 섬기고, 엄마가 아들을 섬기고, 아내가 남편을 섬기고, 남편이 아내를 섬기는 등 이러한 상황을 쉽게 볼 수 있다. 이렇게 조사를 계속하면 생명체가 모인 사회에서 봉사하는 행위에는 예외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치가는 자기가 얼마나 대중을 잘 섬길 수 있는지를 설득하려고 공약을 발표한다. 그러면 유권자는 그가 사회에 가치 있는 봉사를 할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의 소중한 표를 준다. 점원은 고객을 섬기고, 예술가는 자본가를 섬긴다. 자본가는 가족을 섬기고, 그 가족은 국가를 섬긴다. 이렇게 어떠한 생명체도 다른 생명체에 봉사하는 것에 예외가 없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따라서 생명체의 영원한 동반자는 봉사이고 봉사가 생명체의 영원한 종교라고 무리 없이 결론 내릴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은 특정한 시대와 상황에 따른 특정한 형태의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 불교 혹은 다른 어떤 종교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명칭은 사나따나 다르마가 아니다. 힌두교도가 믿음을 바꾸어 이슬람교도가 될 수 있고, 이슬람교도가 믿음을 바꾸어 힌두교도가 될 수 있고, 기독교인도 자기 믿음을 바꿀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서도 개종이 다른 이에게 봉사하는 영원한 업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모든 상황에서 힌두교, 이슬람교, 기독교인은 누군가의 종, 즉 누군가를 섬긴다. 따라서 특정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사나따나 다르마라는 주장이 될 수 없다.

실제로 우리는 지고한 주와 봉사로 연결되어 있다. 지고한 주는 최고 향유자이고 우리 생명체는 주의 종이다. 우리는 주의 즐거움을 위해 창조되었고 최고인격신의 영원한 즐거움에 우리가 동참하면 우리 역시 행복해진다. 그렇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 위장에 협력하지 않고는 몸의 어떤 부분도 행복할 수 없는 것처럼 독립적으로 행복해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고한 주께 초월적 사랑의 봉사를 하지 않고 생명체가 행복해질 수 없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다양한 데바를 숭배하거나 그들을 섬기는 것은 허가되지 않는다. 제7장 20절이 이렇게 말한다.

까미이스 따이스 따이르 흐리따-갸나하 kāmais tais tair hṛta-jñānāḥ
쁘라빠댠뗀야 데바따하 prapadyante ’nya-devatāḥ
땀 땀 니야맘 아스타야 taṁ taṁ niyamam āsthāya
쁘라끄리땨 니야따하 스바야 prakṛtyā niyatāḥ svayā

여기서 욕망에 이끌리는 자는 최고인격신 끄리쉬나가 아닌 데바(하위신)들을 숭배한다고 말한다. 끄리쉬나라는 이름을 언급할 때 우리는 종파적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끄리쉬나는 최상의 즐거움을 의미하고 지고한 주가 모든 즐거움의 보고 혹은 저장소라는 사실은 확증되었다. 우리는 모두 즐거움을 좇고 있다. 아난다-마요 비아삿(Ānanda-mayo ’bhyāsāt 《베단따 수뜨라 1.1.12》). 생명체는 주처럼 의식으로 가득하고 행복을 추구한다. 주는 영원히 행복하고 생명체가 주와 함께하며 협력하고 주의 동반자가 되면 생명체도 행복해진다.

주는 행복으로 가득한 브린다반(Vṛndāvana)에서의 유희를 보이시고자 이 물질계에 강림하신다. 주 스리 끄리쉬나께서 브린다반에 계셨을 때, 당신의 소치기 친구들과 소녀 친구들, 브린다반의 다른 거주자들은 물론이고 소와 함께 한 행위는 행복으로 가득했다. 브린다반의 전 주민은 끄리쉬나 외에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러나 주 끄리쉬나는 당신의 아버지 난다 마하라자(Nanda Mahārāja)한테까지 데바 인드라(Indra) 숭배를 못하게 하셨는데 이는 사람들이 어떤 데바 숭배도 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확립하고 싶으셨기 때문이다. 그들의 궁극적 목표는 주의 보금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지고한 주만을 숭배할 필요가 있었다.

스리 끄리쉬나의 보금자리는 바가바드 기따 제15장 6절에 다음과 같이 묘사된다.

나 딷 바사야떼 수르요 na tad bhāsayate sūryo
나 샤샹꼬 나 빠바까하 na śaśāṅko na pāvakaḥ
얃 가뜨바 나 니바르딴떼 yad gatvā na nivartante
딷 다마 빠라맘 마마 tad dhāma paramaṁ mama

 “지고한 내 보금자리는 태양이나 달, 불이나 전기 없이 빛난다. 그곳에 도달하는 자는 결코 이 물질계에 다시 돌아오지 않느니라.”

이 구절은 영적 하늘에 대한 묘사를 제공한다. 물론 우리는 하늘에 대한 물질적 개념을 갖고 있고 태양, 달, 별 등과 같은 것들과 연결 지어 그것을 생각하지만 이 구절에서 주께서는 영원한 하늘에는 태양도 달도 전기나 불같은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씀하시고 그 이유는 영적 하늘은 지고한 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빛, 브라흐마-죠띠(brahma-jyotir)에 의해 이미 환하게 밝기 때문이다. 우리는 힘들게 다른 행성에 도달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주의 보금자리를 이해하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다. 이 보금자리를 골로까(Goloka)라고 한다. 브라흐마 삼히따(5.37)에 이것이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골로까 에바 니바사땨킬라뜨마-부따하(goloka eva nivasaty akhilātma-bhūtaḥ). 주는 당신의 보금자리 골로까에 영원히 거주하시지만, 이 세상에서도 주께 다가갈 수 있고 이를 위해 주께서 당신의 참된 형상, 삿 칫 아난다 비그라하를 보여주신다. 주가 이 형상을 보여주시므로 당신이 어떤 모습인지 우리가 상상할 필요는 없다. 그런 상상과 추측을 멈추게 하시고자 주는 샤마순다라(Śyāmasundara)로 당신을 있는 그대로 직접 드러내신다. 불행히도 어리석은 자들은 주가 우리 안에 오셔서 인간처럼 우리와 함께 놀아주시니까 주를 조롱한다. 그러나 주가 그렇게 하신다고 주를 우리와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주가 당신의 실제 모습을 우리 앞에 드러내시고 당신의 보금자리에서 하는 유희와 같은 것을 보이시는 것은 주의 전지전능함 때문이다.

영적 하늘의 밝은 빛 속에는 수많은 행성이 떠 있다. 브라흐마 죠띠는 최상의 보금자리, 끄리쉬나로까에서 나오고 물질적 행성이 아닌 아난다 마야(ānanda-maya), 친 마야(cin-maya) 행성도 그 빛 속에 떠 있다. 주께서 “나 딷 바사야떼 수르요 나 샤샹꼬 나 빠바까하/ 얃 가뜨바 나 니바르딴떼 딷 다마 빠라맘 마마”라고 말씀하신다. 그 영적 하늘에 도달할 수 있는 자는 물질적 하늘에 다시 내려오지 않아도 된다. 물질적 하늘에서는 달은 물론이고, 가장 높은 행성(브라흐마로까)에 간다고 해도 출생, 죽음, 질병과 늙음이라는 똑같은 조건을 맞게 된다. 물질적 우주 안에 있는 어떤 행성도 물질적 존재의 이 네 가지 원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생명체가 한 행성에서 다른 행성으로 여행하고 있지만 단지 물리적(기계적) 준비만으로 어떤 행성에도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른 행성에 가고자 한다면 거기에 가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이것 또한 언급되어 있다. 얀띠 데바-브라따 데반 삐뜨린 얀띠 삐뜨리-브라따하(yānti deva-vratā devān pitṝn yānti pitṛ-vratāḥ). 우리가 행성 간을 여행하고 싶다면 어떠한 물리적 준비도 필요 없다. 기따가 “얀띠 데바-브라따 데반”이라고 가르친다. 달, 태양, 그리고 더 높은 행성들을 스바르가로까(Svargaloka)라고 한다. 물질계에는 세 가지 다른 위치의 행성이 있고 이것은 상위, 중간, 하위 행성 체계이다. 지구는 중간 행성 체계에 속한다. 바가바드 기따는 상위 행성 체계(데바로까)에 여행가는 매우 간단한 방법을 알려준다. 얀띠 데바-브라따 데반. 그 특정 행성을 지배하는 특정 데바만을 숭배할 필요가 있고 그렇게 하면 달, 태양 혹은 다른 어떤 상위 행성 체계에도 갈 수 있다.

그러나 바가바드 기따는 이 물질계에 있는 어떤 행성에도 가라고 조언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어떤 기계적 방법을 동원해 4만 년이 걸려(누가 그렇게 오래도록 살 수 있겠는가?) 가장 높은 행성인 브라흐마로까에 간다고 하더라도 생로병사라는 물질적 불편을 여전히 겪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상의 행성, 끄리쉬나로까나 영적 하늘 안에 있는 다른 행성들에 가고자 한다면 이러한 물질적 불편을 겪지 않을 것이다. 영적 하늘 안에 있는 모든 행성 중 가장 높은 행성은 골로까 브린다반으로, 이곳은 원초적 인격신 스리 끄리쉬나의 보금자리 중 원래의 행성이다. 이 모든 정보는 바가바드 기따에 나와 있고 그 가르침을 통해 물질계를 떠나 영적 하늘에서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시작하는 법을 배운다.

바가바드 기따의 제15장에서 물질계의 실상이 나와 있다. 거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르드바물람 아다-샤캄 ūrdhva-mūlam adhaḥ-śākham
아스밧탐 쁘라후라뱌얌 aśvatthaṁ prāhur avyayam
찬담시 야샤 빠르나니 chandāṁsi yasya parṇāni
야스 땀 베다 사 베다-빗 yas taṁ veda sa veda-vit

여기에 물질계는 뿌리가 위로 뻗고 가지가 밑으로 나 있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다. 강가나 호숫가 같은 곳에 서면 물에 비친 나무가 거꾸로 보이는 것을 경험한다. 가지는 밑에 있고 뿌리는 위에 있다. 마찬가지로 물질계는 영적 세계의 투영이다. 물질계는 실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 그림자에는 실재도 본체도 없지만 그림자를 통해 본질과 실재가 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사막에는 물이 없지만 신기루가 그런 것이 있다고 암시한다. 물질계에는 물도 행복도 없지만 실제 행복의 참된 물은 영적 세계에 있다.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영적 세계에 이를 수 있다고 주께서 가르쳐 주신다(바가바드 기따 15.5).

니르마나-모하 지따 상가-도샤 nirmāna-mohā jita-saṅga-doṣā
아댜뜨마-니땨 비니브릿따-까마하 adhyātma-nityā vinivṛtta-kāmāḥ
드반드바이르 비묵따하 수카-두카-삼갸이르 dvandvair vimuktāḥ sukha-duḥkha-saṁjñair
갓찬땨무다하 빠담 아뱌얌 땃 gacchanty amūḍhāḥ padam avyayaṁ tat

빠담 아뱌얌, 즉 영원한 왕국은 니르마나 모하인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우리는 호칭을 좇고 있다. 어떤 사람은 무슨 무슨 “님”이라고 불리고 싶어 하고 어떤 사람은 “주인”이 되고 싶어 하며 다른 사람은 대통령이나 부자 혹은 왕이나 다른 무언가가 되고 싶어 한다. 우리가 이런 호칭에 집착하는 한, 우리는 육신에 집착하게 되는데, 호칭은 육신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몸이 아니므로 이것을 깨닫는 것이 영적 깨달음의 첫 단계이다. 우리는 세 가지 물질적 본성과 교류하고 있지만 주를 향한 봉헌을 통해 이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주를 향한 봉헌에 애착이 없으면 물질적 본성에서 벗어날 수 없다. 호칭과 집착은 물질적 본성을 지배하고 싶어 하는 우리 욕망과 욕구 때문에 생겨난다. 물질적 본성을 지배하려는 이 성향을 버리지 않는 한 사나따나 다마, 주의 왕국으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절대 파괴되지 않는 그 영원한 왕국은 헛된 물질적 즐거움에 매혹되지 않고 절대신의 봉사에 전념하는 자가 도달할 수 있다. 그런 자들은 최상의 보금자리에 쉽게 갈 수 있다.

기따의 다른 곳(8.21)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아뱍또’끄샤라 이뜍따스 avyakto ’kṣara ity uktas
땀 아후 빠라맘 가띰 tam āhuḥ paramāṁ gatim
얌 쁘라뺘 나 니바르딴떼 yaṁ prāpya na nivartante
딷 다마 빠라맘 마마 tad dhāma paramaṁ mama

아뱍따는 나타나지 않은 것을 의미한다. 물질계 전부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감각은 너무나 불완전해 이 물질계 속 우주에 있는 모든 별조차 볼 수 없다. 베다 문헌에서 우리는 모든 행성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이것을 믿는 사람도 믿지 않는 사람도 있다. 특히 스리마드 바가바땀에는 모든 중요한 행성에 관해 설명되어 있고 이 물질적 하늘을 넘어서는 영적 세계를 아뱍따, 나타나지 않은 곳이라고 묘사한다. 우리가 이 최고의 왕국을 갈망하고 추구해야 하는 이유는 이 왕국에 도달하면 현재의 물질계로 되돌아올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어떻게 하면 주의 그 보금자리에 갈 수 있는지 묻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것에 관한 정보는 제8장에 나온다. 그곳에서 말하기를,

안따-깔레 짜 맘 에바 anta-kāle ca mām eva
스마란 묵뜨바 깔레바람 smaran muktvā kalevaram
야 쁘라야띠 사 맏-바밤 yaḥ prayāti sa mad-bhāvaṁ
야띠 나스땨뜨라 삼샤야하 yāti nāsty atra saṁśayaḥ

 “그리고 생의 끝에 나를 기억하며 육신을 떠나는 자는 누구나 즉시 나의 본성에 이를 것이다. 이에 관해 의심의 여지가 없다(바가바드 기따 8.5).” 죽음의 순간에 끄리쉬나를 기억하는 사람은 끄리쉬나에게 간다. 우리는 반드시 끄리쉬나의 모습을 기억해야 한다. 몸을 떠날 때 주의 모습을 생각하는 자는 틀림없이 영적 왕국에 도달한다. 맏 바밤은 지고한 존재의 초월적 특성을 말한다. 지고한 존재는 삿 칫 아난다 비그라하이다. 즉 당신의 형상은 영원하고 지식으로 가득하며 행복하다. 우리가 현재 지닌 몸은 삿 칫 아난다가 아니다. 그것은 “삿”이 아니라 “아삿”이다. 영원하지 않고 없어진다. 그것은 지식으로 가득한 “칫”이 아니라 무지로 가득하다. 우리는 영적 왕국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고 이 물질계에 관해서도 완전한 지식을 갖추고 있지 않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너무나 많다. 육신은 또한 니르아난다(nirānanda)이다. 행복으로 가득한 것이 아니라 불행으로 가득하다. 물질계에서 경험하는 모든 불행은 육신에서 비롯되지만 이 몸을 떠날 때 최고인격신, 주 끄리쉬나를 생각하는 자는 즉시 삿 칫 아난다 몸을 얻을 수 있다.

물질계에서 이 몸을 버리고 다른 몸을 받는 과정 또한 조직적이다. 우리는 어떤 형태의 몸을 다음 생에 받을지 정해진 다음 죽는다. 생명체 스스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존재가 이것을 결정한다. 이 삶에서 우리가 한 행위에 따라 올라가거나 내려간다. 현생은 내생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현생에 절대신의 왕국으로 격상될 준비를 하면 이 물질적 육신을 떠난 후 반드시 주의 몸과 같은 영적 몸을 얻게 된다.

앞서 설명했듯이 서로 다른 초월주의자가 있다. 그것은 브라흐마-바디(brahma-vādī), 빠람아뜨마-바디(paramātma-vādī), 그리고 헌애자(devotee)이다. 그리고 브라흐마 죠띠(영적 하늘)에는 수많은 영적 행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이 행성들의 수는 이 물질계에 있는 모든 행성의 수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훨씬 더 많다. 이 물질계는 창조된 세계의 약 ¼에 불과하다(에깜세나 스티또 자갓 ekāṁśena sthito jagat). 이 물질계에 존재하는 수천 수억의 우주 각각에는 수천 조를 넘는 행성과 해, 달, 별들이 있다. 그러나 이 모든 물질계는 전체 창조물의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창조물은 영적 하늘 안에 있다. 지고한 브라흐만의 존재 안에 합쳐지고 싶은 자는 즉시 주의 브라흐마 죠띠로 옮겨져 영적 하늘과 하나가 된다. 주와 교류하고 싶은 헌애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바이꾼타(Vaikuṇṭha) 행성으로 옮겨져 주의 완전한 확장인 네 팔의 나라야나(Nārāyaṇa)와 쁘라듐나(Pradyumna), 아니룯다(Aniruddha), 고빈다(Govinda) 같이 여러 다른 이름을 한 똑같은 주와 그곳에서 함께 지낸다. 그러므로 생의 마지막에 초월주의자들은 브라흐마 죠띠나 빠람아뜨마 혹은 최고인격신 스리 끄리쉬나를 생각한다. 이 세 가지 경우 모두 영적 하늘 안에 들어가지만, 오직 헌애자나 주와 개인적 교류를 하는 자만이 바이꾼타 행성이나 골로까 브린다반에 들어간다. 주는 여기에 “이에 관해 의심의 여지도 없다.”라고 덧붙이신다. 이것을 확고히 믿어야 한다. 우리 생각과 맞지 않는다고 거부해서는 안 되며 아르주와 같은 태도를 보여야 한다. “당신이 하신 모든 말씀을 저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순간에 주를 브라흐만 혹은 빠람아뜨마 혹은 최고인격신으로 생각하는 누구라도 틀림없이 영적 하늘에 들어가고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을 믿지 않을 이유는 없다.

바가바드 기따(8.6)는 죽음의 순간에 그저 주를 생각함으로써 영적 왕국에 들어가는 것이 가능하다는 일반 원칙 또한 설명한다.

얌 얌 바삐 스마란 바밤 yaṁ yaṁ vāpi smaran bhāvaṁ
땨자땬떼 깔레바람 tyajaty ante kalevaram
땀 땀 에바이띠 까운떼야 taṁ tam evaiti kaunteya
사다 딷-바바-바비따하 sadā tad-bhāva-bhāvitaḥ

 “현생의 몸을 버리는 순간에 기억하는 어떠한 것이든, 다음 생에서 반드시 바로 그 상태를 얻는다.” 이제 물질적 본성이 주의 여러 에너지 중 하나라는 것부터 이해해야 한다. 비쉬누 뿌라나(6.7.61)에 주의 모든 에너지가 설명되어 있다.

비쉬누-샥띠 빠라 쁘록따 viṣṇu-śaktiḥ parā proktā
끄쉐뜨라-갸캬 따타 빠라 kṣetra-jñākhyā tathā parā
아비댜-까르마-삼갸냐 avidyā-karma-saṁjñānyā
뜨리띠야 샥띠르 이샤떼 tṛtīyā śaktir iṣyate

지고한 주는 우리 상상을 초월하는 다양하고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에너지를 갖고 계신다. 그러나 위대한 현인들 혹은 해방된 영혼들이 이 에너지들을 분석하여 세 범주로 분류했다. 모든 에너지는 비쉬누 샥띠로 주 비쉬누의 서로 다른 능력을 뜻한다. 첫 번째 에너지는 빠라(parā), 초월적이다. 이미 설명했듯이 생명체 역시 상위 에너지에 속한다. 다른 에너지들은 물질적 에너지로 무지의 특성(암성)을 지닌다. 죽음의 순간에 우리는 하위 에너지인 물질계에 남거나 영계의 에너지로 이동할 수 있다. 그래서 바가바드 기따(8.6)가 이렇게 말한다.

얌 얌 바삐 스마란 바밤 yaṁ yaṁ vāpi smaran bhāvaṁ
땨자땬떼 깔레바람 tyajaty ante kalevaram
땀 땀 에바이띠 까운떼야 taṁ tam evaiti kaunteya
사다 딷-바바-바비따하 sadā tad-bhāva-bhāvitaḥ

 “현생의 몸을 버리는 순간에 기억하는 어떠한 것이든, 다음 생에서 반드시 바로 그 상태를 얻는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물질적 에너지나 영적 에너지에 관해서 생각하는 데 익숙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생각을 물질적 에너지에서 영적 에너지로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이 세상에는 우리의 사고를 물질적 에너지로 가득 채우는 신문, 잡지, 소설 같은 문헌이 너무 많이 있다. 이런 문헌에 몰입해 있는 우리 사고를 베다 문헌으로 반드시 전환해야 한다. 그러므로 위대한 현인들은 뿌라나 같이 아주 많은 베다 문헌을 편찬했다. 뿌라나는 상상력으로 창작된 문학이 아니다. 그것은 역사적 기록이다. 차이따냐 차리땀리따(Caitanya-caritāmṛta 마댜 20.122)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마야-묵다 지베라 나히 스바따 끄리쉬나-갸나 māyā-mugdha jīvera nāhi svataḥ kṛṣṇa-jñāna
지베라 끄리빠야 까일라 끄리쉬나 베다-뿌라나 jīvere kṛpāya kailā kṛṣṇa veda-purāṇa

잘 망각하는 생명체 혹은 속박된 영혼들은 주와의 관계를 잊어버리고 물질적 행위에 관한 생각에 몰두해 있다. 생각하는 힘을 영적 하늘로 전환하기 위해 끄리쉬나 드바이빠야나 비아사(Kṛṣṇa-dvaipāyana Vyāsa)가 다작의 베다 경전을 편찬했다. 그는 먼저 베다를 네 부분으로 나눈 다음, 그것들을 뿌라나에 설명했고 지성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 마하바라따(Mahābhārata)를 썼다. 마하바라따 안에 바가바드 기따가 등장한다. 그런 다음 모든 베다 문헌을 베단따 수뜨라(Vedānta-sūtra)로 요약했고 장래의 지침이 되도록 베단따 수뜨라를 있는 그대로 해설한 스리마드 바가바땀을 저술했다. 우리는 항상 이 베다 문헌을 읽는 데 우리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물질주의자들이 신문과 잡지 같은 여러 물질주의적 글을 읽는 데 정신을 쏟는 것처럼 우리의 독서를 비아사데바가 우리에게 선사한 이런 문헌으로 전환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죽음의 순간에 지고한 주를 기억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것이 주께서 제안하신 단 하나의 방법이고 당신이 그 결과를 보장하신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따스맛 사르베슈 깔레슈 tasmāt sarveṣu kāleṣu
맘 아누스마라 유댜 짜 mām anusmara yudhya ca
마이 아르삐따-마노-붇디르 mayy arpita-mano-buddhir
맘 에바이샤시 아삼샤야하 mām evaiṣyasy asaṁśayaḥ

 “그러므로 아르주나여, 항상 끄리쉬나의 모습으로 나를 기억할 것이며, 동시에 규정된 내 의무인 전투를 다 하여라. 너의 행위를 나에게 바치고, 너의 마음과 지성을 나에게 집중하면 틀림없이 나에게 이를 것이다(바가바드 기따 8.7).”

주는 아르주나에게 오직 당신만을 기억하고 자기 의무는 저버리라고 권유하지 않으신다. 그렇지 않다. 주는 실용적이지 않은 것은 절대 말씀하지 않으신다. 이 물질계에서는 육신을 유지하려면 일을 해야만 한다. 인간 사회는 일의 종류에 따라 브라흐마나(brāhmaṇa), 끄샤뜨리야(kṣatriya), 바이샤(vaiśya), 슈드라(śūdra)의 네 계층으로 나뉜다. 브라흐마나, 즉 지식 계층이 하는 일이 있고, 끄샤뜨리야, 즉 행정 계층이 하는 일이 따로 있으며 상인 계층과 노동 계층 역시 자기 특정한 임무에 종사한다. 인간 사회에서 노동자든, 상인이든, 관료든, 농부든, 혹은 가장 높은 계층에 속하는 학자나 과학자, 신학자라도 누구나 자기 존재를 유지하기 위해 일해야 한다. 그러므로 주는 아르주나에게 직업을 버리지 말고, 그 일에 종사하면서 끄리쉬나를 기억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맘 아누스마라 mām anusmara). 만일 존재를 위한 고군분투에만 치중하다 끄리쉬나를 기억하는 연습을 하지 못하면 죽음의 순간에 끄리쉬나를 기억할 수 없게 된다. 주 차이따냐께서도 이렇게 조언하신다. 끼르따니야 사다 하리히(kīrtanīyaḥ sadā hariḥ). “주의 이름을 항상 구송(口誦)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주의 이름과 주는 서로 다르지 않다. 따라서 주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나를 기억하라”라고 하신 가르침과 주 차이따냐께서 “항상 주 끄리쉬나의 이름을 구송하라”라고 하신 가르침은 같은 것이다. 끄리쉬나와 끄리쉬나의 이름은 서로 다르지 않으므로 이에는 어떠한 차이도 없다. 절대적 상태에서는 지시하는 말과 지시 대상의 차이가 없다. 그러므로 주의 이름을 구송함으로써 주를 항상 하루 24시간 기억하는 연습을 해야 하고 주를 늘 기억할 수 있게 우리 삶의 행위를 만들어나가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아차리아들은 다음과 같은 예를 제공했다. 결혼한 여자가 다른 남자를 연모하거나, 어떤 남자가 자기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정을 두게 되면 그 집착은 매우 강하다고 한다. 그런 집착이 있는 자는 항상 사랑하는 사람만을 생각한다. 자기 애인을 생각하는 아내는 집안일을 하는 동안에도 항상 그를 만날 생각만 한다. 실제로 이런 여자는 남편이 자기 외도를 알아차리지 못하게 하려고 집안일을 더 주의 깊게 잘한다. 이처럼 우리는 최고의 연인, 스리 끄리쉬나를 항상 기억해야 하는 동시에 우리의 물질적 의무를 잘 수행해야 한다. 강한 사랑의 감정이 여기에 필요하다. 우리가 지고한 주를 향한 강한 사랑의 감정을 갖게 되면 우리 의무를 다하는 동시에 주를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랑의 감정은 발전시켜야만 한다. 예를 들어 아르주나는 항상 끄리쉬나를 생각했다. 그는 끄리쉬나의 영원한 벗임과 동시에 전사였다. 끄리쉬나께서는 아르주나에게 전쟁을 포기하고 명상을 위해 숲으로 가라고 조언하지 않으셨다. 주 끄리쉬나께서 아르주나에게 요가 체계를 설명하실 때 아르주나는 이 요가 실천은 자기에게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아르주나 우바짜 arjuna uvāca

요’얌 요가스 뜨바야 쁘록따하 yo ’yaṁ yogas tvayā proktaḥ
삼예나 마두수다나 sāmyena madhusūdana
에따샤함 나 빠샤미 etasyāhaṁ na paśyāmi
짠짤라뜨밧 스티띰 스티람 cañcalatvāt sthitiṁ sthirām

 “아르주나가 말했습니다: 오 마두수다나, 당신께서 요약해주신 요가 체계는 비실용적이고 제가 견디어내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란 쉬지 않고 꾸준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바가바드 기따 6.33).”

그러나 주께서 말씀하신다.

요기남 아삐 사르베샴 yoginām api sarveṣāṁ
맏-가떼난따라뜨마나 mad-gatenāntar-ātmanā
스랃다반 바자떼 요 맘 śraddhāvān bhajate yo māṁ
사 메 육따따모 마따하 sa me yukta-tamo mataḥ

 “모든 요기 가운데 굳은 신념으로 항상 내 안에 살고, 자기 안에서 나를 생각하며, 나에게 초월적 사랑의 봉사를 하는 자는 요가 안에서 가장 친밀하게 나와 하나되며 모든 이 중 가장 높은 자이다. 내 뜻은 이러하다(바가바드 기따 6.47).” 그래서 지고한 주를 항상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위대한 요가행자(요기 yogī)이고 최고의 지식인(갸니 jñānī)이며 동시에 가장 위대한 헌애자다. 더 나아가 주께서는 아르주나에게 끄샤뜨리야로서 싸움을 포기해서는 안 되며 싸우는 동안 끄리쉬나를 기억하면 죽는 순간 끄리쉬나를 기억할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렇게 하려면 주를 향한 초월적 사랑의 봉사에 자신을 완전히 바쳐야 한다.

사실 우리는 몸으로 일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과 지성으로 일한다. 그래서 지성과 마음을 항상 지고한 주를 생각하는 데 전념하면 자연히 감각도 주의 봉헌에 관여하게 된다. 피상적으로, 감각이 여전히 같은 행위를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의식이 바뀌었다. 바가바드 기따는 우리의 마음과 지성을 주를 생각하는 데 전념하게 하는 법을 가르친다. 그러한 몰입으로 우리 자신을 주의 왕국으로 이동시킬 수 있다. 마음이 주의 봉헌에 관여하면 감각도 저절로 주의 봉헌에 종사하게 된다. 스리 끄리쉬나의 생각에 완전히 몰입하는 것이 기술이며 또한 바가바드 기따의 비밀이다.

현대인은 달에 가려고 큰 노력을 기울이지만 자기 자신을 영적으로 향상시키려고는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지 않는다. 만약 인간에게 앞으로 목숨이 50년밖에 남지 않았다고 하면 이 짧은 시간을 최고인격신을 기억하는 연습으로 보내야 한다. 이 연습이 바로 봉헌의 과정이다.

스라바남 끼르따남 비쉬노호 śravaṇaṁ kīrtanaṁ viṣṇoḥ
스마라남 빠다-세바남 smaraṇaṁ pāda-sevanam
아르짜남 반다남 다샴 arcanaṁ vandanaṁ dāsyaṁ
사캼 아뜨마니베다남 sakhyam ātma-nivedana

(스리마드 바가바땀 7.5.23)

이 아홉 가지의 과정 중에서 가장 쉬운 것이 스라바남, 즉 깨달은 사람에게서 바가바드 기따를 들음으로써 지고한 존재를 생각하게 된다. 이로써 육신을 버린 후 주와 함께하기에 적합한 영적 몸을 받게 될 것이다.

주께서 더욱 말씀하시기를,

아뱌사-요가-육떼나 abhyāsa-yoga-yuktena
쩨따사 난야-가미나 cetasā nānya-gāminā
빠라맘 뿌루샴 디뱜 paramaṁ puruṣaṁ divyaṁ
야띠 빠르타누찐따얀 yāti pārthānucintayan

 “최고인격신으로서 나를 명상하고, 그 길에서 벗어남 없이 마음을 지속해서 나를 기억하는 데 두는 자는, 오 빠르타, 반드시 나에게 이르느니라.” (바가바드 기따 8.8)

이것은 그리 어려운 과정이 아니다. 그러나 반드시 경험 있는 사람에게서 배워야 한다. “딷 비갸나르탐 사 구룸 에바비갓쳇(Tad-vijñānārthaṁ sa gurum evābhigacchet).” 이미 실천하고 있는 사람을 찾아가야 한다. 마음은 항상 이리저리 날아다니지만, 그 마음을 항상 지고한 주, 스리 끄리쉬나의 형상이나 이름이 내는 소리에 두고 집중하는 연습을 해야 한다. 마음은 본래 여기저기 다니며 쉴 새 없지만 끄리쉬나라는 소리의 진동으로 안정을 찾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영적 왕국, 영적 하늘에 계시는 빠라맘 뿌루샴(paramaṁ puruṣam), 최고인격신을 명상함으로써 주에 이를 수 있다. 궁극적 깨달음, 궁극적 달성을 향한 길과 방법이 바가바드 기따에 설명되어 있고, 이 지식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그 누구에게도 금지되어 있지 않다. 모든 계층의 사람이 주 끄리쉬나를 생각함으로써 주께 다가갈 수 있으며 주에 관해 듣고 생각하는 것 또한 누구에게나 가능하다.

주께서 더욱 말씀하시기를(바가바드 기따 9.32~33),

맘 히 빠르타 뱌빠스리땨 māṁ hi pārtha vyapāśritya
예’삐 슈 빠빠-요나야하 ye ’pi syuḥ pāpa-yonayaḥ
스뜨리요 바이샤스 따타 슈드라스 striyo vaiśyās tathā śūdrās
떼’삐 얀띠 빠람 가띰 te ’pi yānti parāṁ gatim

낌 뿌나르 브라흐마나 뿐야 kiṁ punar brāhmaṇāḥ puṇyā
박따 라자르샤야스 따타 bhaktā rājarṣayas tathā
아니땸 아수캄 로깜 anityam asukhaṁ lokam
이맘 쁘라뺘 바자스바 맘 imaṁ prāpya bhajasva mām

따라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상인, 여성, 노동자 또는 가장 낮은 지위의 인간도 절대자에 이를 수 있다고 하셨다. 아주 해박한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요점은 박띠 요가의 원칙을 받아들여 지고한 주를 삶의 정수, 최고의 목표, 궁극적 목표로 받아들이는 자는 영적 하늘에 계신 주께 도달할 수 있다. 바가바드 기따에 분명히 말씀된 원칙들을 적용하면 인간은 완벽한 삶을 살 수 있고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영원한 해결책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이 바가바드 기따 전체의 요점이다.

결론은 바가바드 기따는 매우 주의 깊게 읽어야 할 초월적 문헌이다. 기따-샤스뜨람 이담 뿐얌 야 빠텟 쁘라야따 뿌만(Gītā-śāstram idaṁ puṇyaṁ yaḥ paṭhet prayataḥ pumān). 바가바드 기따의 가르침을 올바로 따르면 삶의 모든 불행과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바야-쇼까디-바르지따하(Bhaya-śokādi-varjitaḥ). 현생의 모든 두려움에서 벗어나 내생은 영적으로 될 것이다(기따 마하뜨먀 1).

또 다른 혜택도 있다.

기따댜야나-실라샤 gītādhyāyana-śīlasya
쁘라나야마-빠라샤 짜 prāṇāyāma-parasya ca
나이바 산띠 히 빠빠니 naiva santi hi pāpāni
뿌르바-잔마-끄리따니 짜 pūrva-janma-kṛtāni ca

“아주 참되고 진지한 마음으로 바가바드 기따를 읽으면 주의 은총으로 지난 잘못의 반작용이 인간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을 것이다(기따 마하뜨먀 2).” 주께서 바가바드 기따의 마지막에서 아주 크게 말씀하시기를 (바가바드 기따 18.66),

사르바-다르만 빠리땨쟈 sarva-dharmān parityajya
에깜 샤라남 브라자 mām ekaṁ śaraṇaṁ vraja
아함 뜨밤 사르바-빠뻬뵤 ahaṁ tvāṁ sarva-pāpebhyo
목샤이샤미 슈짜하 mokṣayiṣyāmi mā śucaḥ

 “모든 형태의 종교를 버리고 그저 나에게 항복하라. 내가 모든 죄업에서 너를 구할 것이다. 두려워 말라.” 따라서 주께서는 당신에게 완전히 은신한 자를 책임지시고 그가 죄업을 받지 않도록 보호하신다.

말라-니르모짜남 뿜삼 mala-nirmocanaṁ puṁsāṁ
잘라-스나남 디네 디네 jala-snānaṁ dine dine
사끄릳 기땀리따-스나남 sakṛd gītāmṛta-snānaṁ
삼사라-말라-나샤남 saṁsāra-mala-nāśanam

“우리는 매일 목욕함으로써 우리 자신을 씻지만, 바가바드 기따의 신성한 갠지스 물에 단 한 번만이라도 목욕하면 물질적 삶의 모든 먼지가 완전히 제거된다(기따 마하뜨먀 3).”

기따 수-기따 까르따비아 gītā su-gītā kartavyā
낌 안야이 샤스뜨라-비스따라이히 kim anyaiḥ śāstra-vistaraiḥ
야 스바얌 빠드마나바샤 yā svayaṁ padmanābhasya
무카-빠드맏 비니히스리따 mukha-padmād viniḥsṛtā

최고인격신께서 바가바드 기따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베다 경전을 읽을 필요가 없다. 주의 깊게, 그리고 규칙적으로 바가바드 기따를 듣고 읽을 필요만 있을 뿐이다. 현시대에 사람들은 세속적 활동에만 지나치게 몰두하므로 모든 베다 경전을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것을 다 읽을 필요도 없다. 바가바드 기따는 모든 베다 경전의 핵심이며 특히 최고인격신께서 직접 말씀하셨으므로 이 한 권의 책으로 충분하다(기따 마하뜨먀 4).

또한 이렇게 말하기를,

바라땀리따-사르바스밤 bhāratāmṛta-sarvasvaṁ
비쉬누-박뜨랃 비니스리땀 viṣṇu-vaktrād viniḥsṛtam
기따-강고다깜 삐뜨바 gītā-gaṅgodakaṁ pītvā
뿌나 잔마 나 비댜떼 punar janma na vidyate

“갠지스의 물을 마시는 자도 구원을 얻는데 바가바드 기따의 감로수를 마시는 자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바가바드 기따는 마하바라따의 정수이며, 원초적 비쉬누, 주 끄리쉬나께서 직접 말씀하셨다(기따 마하뜨먀 5).” 바가바드 기따는 최고 인격신의 입에서 나오고 갠지스는 주의 연꽃 같은 발에서 발산한다고 한다. 물론 주의 입과 발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지만, 공정한 연구의 측면에서 볼 때 바가바드 기따가 갠지스의 물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평가할 수 있다.

사르보빠니샤도 가보 sarvopaniṣado gāvo
독다 고빨라-난다나하 dogdhā gopāla-nandanaḥ
빠르토 밧사 수-디르 복따 pārtho vatsaḥ su-dhīr bhoktā
둑담 기땀리땀 마핫 dugdhaṁ gītāmṛtaṁ mahat

“모든 우빠니샤드의 핵심인 이 기또빠니샤드, 바가바드 기따는 소와 같고, 소치는 소년으로 유명한 주 끄리쉬나는 이 소의 젖을 짜고 있다. 아르주나는 바로 송아지와 같고, 학식 있는 학자들과 순수한 헌애자들은 바가바드 기따라는 감로수 같은 우유를 마셔야 한다(기따 마하뜨먀 6).”

에깜 샤스뜨람 데바끼-뿌뜨라-기땀 ekaṁ śāstraṁ devakī-putra-gītam
에꼬 데보 데바끼-뿌뜨라 에바 eko devo devakī-putra eva
에꼬 만뜨라스 따샤 나마니 야니 eko mantras tasya nāmāni yāni
까르마뼤깜 따샤 데바샤 세바 karmāpy ekaṁ tasya devasya sevā

(기따 마하뜨먀 7)

오늘날 사람들은 하나의 경전, 하나의 신(神), 한 종교와 한 직업을 갖기를 무척 희망한다. 그러므로 에깜 샤스뜨람 데바끼-뿌뜨라-기땀, 전 세계를 위해 하나의 공통된 경전만 있게 하자, 바가바드 기따. 에꼬 데보 데바끼-뿌뜨라 에바, 전 세계에 하나의 신(神)만 있게 하자, 스리 끄리쉬나. 에꼬 만뜨라스 따샤 나마니, 그리고 하나의 구송, 하나의 진언(만뜨라), 하나의 기도만 있게 하자, 주의 이름을 구송하는 것, 하레 끄리쉬나, 하레 끄리쉬나, 끄리쉬나 끄리쉬나, 하레 하레 / 하레 라마, 하레 라마, 라마 라마, 하레 하레. 까르마뼤깜 따샤 데바샤 세바, 그리고 하나의 일만 있게 하자, 최고인격신을 향한 봉헌.

사제 전수(DISCIPLIC SUCCESSION)

에밤 빠람빠라-쁘랍땀 이맘 라자르샤요 비두후(Evaṁ paramparā-prāptam imaṁ rājarṣayo viduḥ, 바가바드 기따 4.2). 이 바가바드 기따 있는 그대로는 다음의 사제 전수를 통해 전해 내려왔다.

1. Kṛṣṇa 끄리쉬나
2. Brahmā 브라흐마
3. Nārada 나라다
4. Vyāsa 비아사
5. Madhva 마드바
6. Padmanābha 빠드마나바
7. Nṛhari 느리하리
8. Mādhava 마아드바
9. Akṣobhya 악쇼뱌
10. Jaya Tīrtha 자야 띠르타
11. Jñānasindhu 갸나신두
12. Dayānidhi 다야니디
13. Vidyānidhi 비댜니디
14. Rājendra 라젠드라
15. Jayadharma 자야다르마
16. Puruṣottama 뿌루숏따마
17. Brahmaṇya Tīrtha 브라흐만야 띠르타
18. Vyāsa Tīrtha 비아사 띠르타
19. Lakṣmīpati 락쉬미빠띠
20. Mādhavendra Purī 마다벤드라 뿌리
21. Īśvara Purī, (Nityānanda, Advaita) 이스바라 뿌리, (니땨난다, 아드바이따)
22. Lord Caitanya 주 차이따냐
23. Rūpa, (Svarūpa, Sanātana) 루빠, (스바루빠, 사나따나)
24. Raghunātha, Jīva 라구나타, 지바
25. Kṛṣṇadāsa 끄리쉬나다사
26. Narottama 나롯따마
27. Viśvanātha 비스바나타
28. (Baladeva), Jagannātha (발라데바), 자간나타
29. Bhaktivinoda 박띠비노다
30. Gaurakiśora 고라끼쇼라
31. Bhaktisiddhānta Sarasvatī 박띠싯단따 사라스바띠
32. A. C. Bhaktivedanta Swami Prabhupāda 아바이 차란 박띠베단따 스와미 쁘라부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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