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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장

브라흐마가 주 끄리쉬나께 바친 기도문

브라흐마 말했다. “오 친애하는 주님, 당신은 단 하나의 숭배받아 마땅한 지고한 주, 최고인격신이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당신을 기쁘게 해 드리고자 경배와 기도문을 올립니다. 당신의 몸은 물이 가득한 구름 색깔입니다. 당신의 노란색 옷에서 발산하는 은빛 전기 아우라로 당신은 번쩍이고 있습니다.

“소라껍데기 귀걸이를 하고 공작새 깃털을 머리 위에 꽂고 제 앞에 계신 마하라자 난다의 아들께 거듭하여 경배 올립니다. 당신의 얼굴은 아름답습니다. 당신은 투구를 쓰고 계시고 숲속 꽃들로 장식되어 계시며 당신 손안에 음식 한 입을 가지고서 계십니다. 당신은 지팡이와 버팔로 뿔 나팔, 그리고 피리로 장식되어 계십니다. 당신은 제 앞에 작은 연꽃 발로 서계십니다.

“친애하는 주님, 사람들은 제가 모든 베다 지식의 스승이라고 말할 것이고 제가 이 우주의 창조자여야 하지만 제 앞에 아이로 계신 당신을 제가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제 증명되었습니다. 당신은 심지어 충분한 교육도 받지 않았다고 암시하듯 당신의 소년 친구들과 송아지들과 놀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손에 음식을 쥐고 당신의 송아지들을 찾고 있는 그저 농촌 아이같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당신과 제 몸 사이에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어 저는 당신의 몸이 지닌 능력을 가늠할 수조차 없습니다. 브라흐마 삼히따에서 제가 이미 명시했듯, 당신의 몸은 물질로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

브라흐마 삼히따에서 명시하기를, 주의 몸은 전적으로 영적이다. 주의 몸과 당신 자신 사이에는 어떤 차이점도 없다. 당신의 몸 각 부위는 다른 모든 부위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주는 당신의 손으로 보실 수 있고, 당신의 눈으로 들으실 수 있으며 당신의 다리로 봉헌물을 받아들이실 수 있고, 당신의 입으로 창조하실 수 있다.

브라흐마 계속 말했다. “소치기 소년으로서 당신이 현현하신 것은 헌애자들을 위해서이고 비록 제가 당신의 소년들과 송아지들을 데려감으로써 당신의 연꽃발에 잘못을 저질렀지만 당신이 제게 자비를 내려주시리라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당신의 헌애자들에게 아주 애정이 있으신 당신의 초월적 자질입니다. 그러나 저를 향한 당신의 깊은 애정에도 불구하고 저는 당신의 몸이 하는 행위들의 힘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이 우주의 가장 높은 인격인 저 주 브라흐마가 최고인격신의 아이 같은 몸을 추정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당신의 초월적 유희들에 관해서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가바드 기따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누구라도 주의 초월적 유희들과 현현, 사라지심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면 물질적 몸을 버린 후 절대신의 왕국으로 들어갈 자격이 있습니다. 이 주장은 베다에서 그저 최고인격신을 이해함으로써 반복된 출생과 죽음의 사슬을 극복할 수 있다고 확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사람들에게 자기들의 추론적 지식으로 당신을 이해하려 하지 말 것을 권합니다.

“당신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과정은 순종적으로 사색 과정을 버리고 당신에 관해 당신께서 바가바드 기따에 주신 말씀들을 듣거나 다른 유사한 베다 문헌을 당신의 연꽃 발에 은신한 깨달은 헌애자에게서 듣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헌애자에게서 추측 없이 들어야 합니다. 자기의 세속적 위치를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그저 당신의 메시지를 들어야 합니다. 당신은 물질적 감각으로 이해될 수 없지만 당신에 관해 그저 들음으로써 인간은 점점 오해라는 무지를 정복할 수 있습니다. 오직 당신의 은총으로 헌애자에게 당신은 드러나게 됩니다. 다른 방법으로는 당신은 정복될 수 없습니다. 조금의 봉헌도 없는 추론적 지식으로 당신을 찾는 것은 그저 쓸데없는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봉헌은 너무나 중요해서 약간의 시도로 가장 높은 완성의 단계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상서로운 봉헌의 과정을 게을리하고 추측하는 방법을 써서는 안 됩니다. 추측으로 당신의 우주적 발현에 관한 부분적 지식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모든 것의 근원인 당신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추측하는 지식에만 관심 있는 자들의 시도는 논의 빈 껍질을 두드리는 것처럼 그저 쓸데없는 노동입니다. 적은 양의 벼는 회전 숫돌로 갊으로써 깍지를 벗길 수 있고 어느 정도의 쌀을 얻을 수 있지만, 회전 숫돌로 이미 두드린 벼 껍질은 아무리 많은 양의 껍질을 두드린다고 해도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쓸데없는 노동일 뿐입니다.

“친애하는 주님, 인간 사회의 역사 안에서 초월적 단계에 이르는 데 실패한 자가 자기의 몸과 마음, 그리고 말을 봉헌에 종사하게 함으로써 당신의 보금자리에 들어가는 가장 높은 완성의 경지를 이룬 많은 예가 있습니다. 당신을 추측이나 신비적 명상으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과정은 봉헌 없이는 모두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세속적 행위 안에서도 당신을 향한 봉헌에 종사해야 하고 당신의 초월적 영광을 듣고 구송하는 과정을 통해 항상 당신 가까이 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당신의 영광에 관해 그저 듣고 구송하는 데 애착을 가짐으로써 당신의 왕국에 들어가는 가장 높은 완성의 경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영광에 관해 듣고 구송함으로써, 당신의 만족만을 위해 자기 일의 결과를 바침으로써 당신께 항상 닿고, 아주 쉽고 행복하게 당신의 지고한 보금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가슴에 모든 더러움이 씻겨나간 자들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가슴을 씻는 일은 주님 당신의 영광을 구송하고 들음으로써 가능합니다.”

“친애하는 주님, 인간 사회의 역사 안에서 초월적 단계에 이르는 데 실패한 자가 자기의 몸과 마음, 그리고 말을 봉헌에 종사하게 함으로써 당신의 보금자리에 들어가는 가장 높은 완성의 경지를 이룬 많은 예가 있습니다. 당신을 추측이나 신비적 명상으로써 이해하려고 하는 과정은 봉헌 없이는 모두 소용없습니다. 그러므로 자기 세속적 행위 안에서도 당신을 향한 봉헌에 종사해야 하고 당신의 초월적 영광을 듣고 구송하는 과정을 통해 항상 당신 가까이 있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당신의 영광에 관해 그저 듣고 구송하는 데 애착을 가짐으로써 당신의 왕국에 들어가는 가장 높은 완성의 경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영광에 관해 듣고 구송함으로써, 당신의 만족만을 위해 자기 일의 결과를 바침으로써 당신께 항상 닿고, 아주 쉽고 행복하게 당신의 지고한 보금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당신은 가슴에 모든 더러움이 씻겨나간 자들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 가슴을 씻는 일은 주님 당신의 영광을 구송하고 들음으로써 가능합니다.”

베단따 수뜨라의 첫 부분에 설명되어 있듯이, 지고한 주는 모든 자질의 기원이다. 주는 보통 니르구나(nirguṇa)로 불린다. 니르구나는 “그의 자질은 계산을 넘어선다”라는 뜻이다. 구나는 “자질”을 의미하고 니르는 “계산, 혹은 판단을 넘어서는”을 뜻한다. 그러나 비인성주의자들은 이 니르구나라는 단어를 “자질을 가지지 않음”으로 해석한다. 그들이 초월적 깨달음으로 주의 자질을 계산할 수 없으니까 지고한 주는 자질이 없다고 결론 짓는다. 그러나 그것은 주의 위치가 아니다. 진짜 위치는 당신은 모든 자질의 원초적 근원이라는 것이다. 모든 자질은 계속해서 당신에게서 발산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한계가 있는 인간이 주의 자질을 계산할 수 있단 말인가? 주의 자질을 한순간 측정할 수 있을지는 몰란도 다음 순간 그 자질은 증가한다. 그래서 주의 초월적 자질을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당신은 니르구나라고 불린다.

우리는 주의 자질을 측정하려고 사색적 추측이라는 쓸데없는 노동을 해서는 안 된다. 신비적 요가 완성을 이루려고 추측하거나 신체를 연마하는 방법을 적용할 필요는 없다. 그저 이 몸의 불행과 행복은 이미 정해진 것임을 이해하여 이 육체적 존재의 불행을 피하거나 다양한 운동을 통해 행복을 구하려는 시도할 필요가 없다. 최고의 과정은 최고인격신께 몸과 마음, 그리고 말을 바치고 항상 당신을 섬기는 데 종사하는 것이다. 이 초월적 노동은 결실이 있지만, 절대 진리를 이해하려는 다른 시도들은 절대 성공적일 수 없다. 그러므로 지성 있는 자는 절대 진리를 추측이나 신비적 힘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봉헌에 종사하고 최고인격신께 의지한다. 그런 자는 몸에 생기는 어떤 것이든 자기의 지난 결실적 행위 때문임을 안다. 만일 봉헌 속에서 그러한 간소한 삶을 산다면 저절로 주의 초월적 보금자리를 물려받는다. 실제로 모든 생명체는 지고한 주의 부분이고 자식이다. 각 생명체는 주의 초월적 즐거움을 물려받고 공유할 자연스러운 권리가 있지만 물질과의 접촉으로 속박된 생명체는 실질적으로 그 권리를 박탈당했다. 우리가 봉헌에 종사하는 간단한 이 방법을 도입하면 물질적 오염에서 벗어나는 자격을 저절로 갖추게 되고 지고한 주와 교류하는 초월적 위치로 올라갈 수 있게 된다.

브라흐마는 주 끄리쉬나께 자기가 가장 주제넘은 생명체라고 말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끄리쉬나께서 지니시는 힘의 경이로움을 확인해 보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그는 주의 소년들과 송아지들을 훔쳐서 주가 어떻게 그들을 되돌리는지 보고 싶어 했다. 이제 브라흐마는 에너지의 근원자 앞에서 자기 에너지를 시험하는 시도를 했기에 자기의 이런 시도가 가장 주제넘다는 것을 인정했다. 정신을 차리자, 주 브라흐마는 이 물질계 안에서 다른 생명체의 판단으로 아주 강력한 존재이지만 최고인격신의 힘과 에너지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해했다. 물질계의 과학자들은 원자폭탄과 같은 경이로운 것을 발명하고 이 행성의 도시나 어떤 중요하지 않은 곳에 시험해 보지만, 그런 강력한 무기는 소위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원자폭탄을 태양에 테스트한다면 그 폭탄이 지니는 가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태양에서는 아무 가치가 없다. 마찬가지로 브라흐마가 스리 끄리쉬나에게서 송아지와 소년들을 훔친 것은 경이로운 신비한 힘의 전시일지는 몰라도 스리 끄리쉬나께서 당신의 확장하는 힘을 너무나 많은 송아지와 소년들 안에서 보이시고 아무 노력 없이 그들을 유지하셨을 때 브라흐마는 자기 힘은 초라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브라흐마는 주 끄리쉬나를 아쮸따(Acyuta)로 지칭했는데 그 이유는 주는 당신의 헌애자가 한 어떤 작은 봉사라도 절대 잊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당신은 당신의 헌애자들에게 너무나 친절하시고 애정이 넘치셔서 그들이 한 작은 봉헌도 아주 큰 것으로 받아들이신다. 브라흐마는 분명 주께 많은 봉헌을 했다. 이 특정 우주의 최고 인격으로서 그는 의심의 여지 없이 끄리쉬나의 충실한 종이다. 따라서 그는 끄리쉬나를 달랠 수 있었다. 그는 주께 자기가 당신의 종임을 이해하시고 자기가 저지른 작은 실수와 무례함을 용서해 주시기를 요청했다. 그는 주 브라흐마로서의 강력한 자기 위치에 거만해졌음을 인정했다. 브라흐마는 이 물질계 안에서 동성(mode of passion) 자질의 화신이므로 이런 행위는 그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어서 실수를 저질렀다. 그러나 브라흐마는 자기가 주 끄리쉬나께 종속되어 있기에 주께서 가엾게 여기시어 자기가 저지른 큰 잘못을 부디 용서해 주시기를 바랐다.

주 브라흐마는 자기의 실제적 위치를 깨달았다. 그는 분명 완전한 물질적 에너지, 거짓 자아, 하늘, 공기, 불, 물, 지구로 이루어진 물질적 본성의 생성을 담당하는 이 우주의 가장 높은 스승이다. 그러한 우주는 거대하지만 우리 몸이 일곱 뼘으로 잴 수 있는 것처럼 측정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의 몸은 자기 손의 일곱 뼘으로 잴 수 있다. 이 특정 우주는 아주 거대한 몸처럼 보이지만 주 브라흐마의 일곱 뼘에 불과하다. 이 우주 외에도 이 특정 브라흐마의 관할 밖에 있는 무수한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 수많은 원자의 무한소 파편들이 스크린 창의 구멍을 통과하는 것처럼 수백 수천만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우주가 그들의 묘목 형태로 마하 바쉬누의 모공에서 나오고 있고 그 마하 비쉬누는 끄리쉬나의 전체적 확장의 부분의 부분일 뿐이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브라흐마가 이 우주 안의 가장 높은 피조물이라고 하더라도 주 끄리쉬나가 계신 곳에서 그의 존재가 지니는 중요성은 무엇이겠는가?

따라서 브라흐마는 자기 자신을 어머니의 자궁 안에 있는 태아로 비유했다. 자궁 안 태아는 자기 손과 발을 가지고 놀고 노는 중에 어머니 몸에 닿지만 어머니가 아기 때문에 기분 상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마찬가지로 브라흐마가 아주 위대한 인격이라고 하더라도 브라흐마 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최고인격신의 자궁 안에 존재하고 있다. 주의 에너지는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한다. 창조의 어떤 곳에도 그 에너지가 작용하지 않는 곳은 없다. 주의 에너지 안에서 모든 것이 존재하고 있으므로 이 우주의 브라흐마와 다른 무수한 우주의 브라흐마는 주의 에너지 안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주는 어머니로 여겨지고 어머니의 자궁 안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아기로 여겨진다. 그리고 좋은 어머니는  아기가 발로 어머니 몸을 차도 아이 때문에 절대 기분 상해하지 않는다.

그런 뒤, 브라흐마는 삼 세계, 즉 불로까(Bhūrloka), 부발로까(Bhuvarloka), 스발로까(Bhuvarloka)로 알려진 세 행성계의 해산 후, 나라야나의 배꼽에서 피어난 연꽃에서 태어난 자기 출생을 말했다. 이 우주는 스바르가(Svarga), 마르땨(Martya), 빠딸라(Pātāla)로 불리는 세 구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세 행성계는 해산이 될 때 물속으로 합쳐진다. 그때 끄리쉬나의 전체적 부분인 나라야나께서 물 위에 누워 계시고 당신의 배꼽에서 연꽃 줄기가 점점 자라고 그 연꽃에서 브라흐마가 태어난다. 브라흐마의 어머니는 나라야나라고 자연스레 결론지을 수 있다. 주는 우주가 해산된 후 모든 생명체가 안식하는 장소이므로 나라야나라고 불린다. “나라(nāra)”라는 단어는 모든 생명체의 총집합을 뜻하고 아야나(ayana)는 쉬는 장소를 의미한다. 가르보다까샤이 비쉬누의 형상을 나라야나라고 부르는데 그 이유는 당신이 그 물 위에 쉬시기 때문이다. 더욱이 당신은 모든 생명체가 안식하는 장소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라야나는 바가바드 기따에서 확증하듯이 모든 이의 가슴 속에도 계신다. 그런 의미에서 주는 나라야나이기도 한데 아야나는 안식처뿐만 아니라 지식의 원천도 의미한다. 바가바드 기따에서도 확증했듯이 생명체의 기억은 가슴속에 계신 초영혼의 존재 때문이다. 몸을 바꾼 후 생명체는 자기 전생에 관한 모든 것을 잊지만 나라야나, 초영혼은 생명체의 가슴속에 계셔서 생명체의 지난 욕망에 따라 행동하도록 당신이 기억을 상기시킨다. 브라흐마는 끄리쉬나가 나라야나의 원천인 원래의 나라야나인지 증명하고 싶었고 그 나라야나는 외적 에너지 마야의 전시가 아니라 영적 에너지의 확장이다. 외저 에너지, 즉 마야의 활약은 우주적 세상의 창조 후에 보이고, 원초적 영적 에너지 나라야나는 창조 전에 활약하신다. 그래서 나랴야나의 확장들, 즉 나라야나에서 까라노다까샤이 비쉬누가, 까라노다까샤이 비쉬누에서 가르보다까샤이 비쉬누가, 가르보다까샤이 비쉬누에서 끄쉬로다까샤이 비쉬누가, 끄쉬로다까샤이 비쉬누에서 모든 사람의 가슴으로 확장되는데 이들은 사실 끄리쉬나의 확장이고 당신의 영적 에너지의 발현이다. 그들은 물질적 에너지에 의해 행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일시적이지 않다. 물질적 에너지에 의해 행해지는 어떤 것이든 일시적이지만 영적 에너지에 행해지는 모든 것은 영원하다.

브라흐마는 끄리쉬나를 원래의 나라야나로 확립하며 자기주장을 재확증했다. 그는 주의 거대한 우주적 형상은 가르보다까라고 알려진 물 위에서 쉬고 계신다고 말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거대한 우주적 형상은 당신이 가지신 에너지의 또 다른 발현입니다. 당신이 그 물 위에 쉬고 계시기 때문에 이 우주적 형상은 나라야나라고도 하며 우리는 모두 이 나라야나 형상의 자궁 안에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여러 다른 나라야나 형상을 모든 곳에서 봅니다. 저는 당신을 물 위에서도, 제 가슴속에서도 볼 수 있고 지금 제 앞에 계신 당신도 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원래의 나라야나입니다.

“친애하는 주님, 이 화신을 통해 당신이 마야의 지고한 통제자임을 증명하셨습니다. 당신은 우주적 발현 안에 계시지만 전 창조가 당신 안에 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입안에서 전 우주적 창조를 당신의 어머니 야쇼다 앞에서 보여주셨을 때 이미 이 사실은 증명되었습니다. 당신의 이해 불가한 요가마야 능력으로 당신은 외부 도움 없이 그러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주 끄리쉬나시여,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전 우주적 발현은 모두 당신의 몸 안에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밖에서 보고 있고 당신 또한 저를 밖에서 보고 계십니다. 당신의 이해 불가한 에너지에 영향받지 않고서 그런 것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브라흐마는 여기서 최고인격신의 이해 불가한 에너지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그가 계속 말했다. “친애하는 주님, 다른 것은 모두 제쳐두고 오늘 일어난 일만 고려하더라도 제가 본 것은 모두 당신의 이해 불가한 에너지 때문이 아닙니까? 먼저 저는 당신 혼자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 뒤 당신이 당신 자신을 소치기 소년들과 송아지들, 그리고 브린다반 전체 존제로 확장하셨습니다. 그후 저는 당신과 모든 소년과 송아지가 네 팔의 비쉬누인 것을 보았고 그들은 모든 요소와 저를 포함한 모든 하위신에게 숭배받고 있었습니다. 다시 그들 모두가 해산되고 당신은 전처럼 혼자 계십니다. 이것이 당신이 모든 것의 기원, 즉 모든 것이 당신에게서 나와서 당신에게로 다시 들어가지만 당신은 이전 그대로 남는 지고한 주 나라야나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이해 불가한 에너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당신 혼자서 창조자(브라흐마), 유지자(비쉬누), 파괴자(시바)로 확장하심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런 것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자들은 저 브라흐마가 창조자이고 비쉬누가 유지자며 시바가 파괴자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당신 혼자 모든 것, 창조자, 유지자, 파괴자입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은 당신 자신을 여러 화신으로 확장하십니다. 하위신 안에서 당신은 바마나데바로, 위대한 성자 안에서 당신은 빠라슈라마로 화신하시고, 인간 안에서 당신은 당신 자신 주 끄리쉬나나 주 라마로서 현현하시며, 동물 안에서 당신은 수퇘지 화신으로, 수생동물 중에서는 물고기화신으로 현현하십니다. 그렇지만 당신에게 현현과 사라지심은 없습니다. 당신은 항상 영원합니다. 당신의 현현과 사라지심은 당신의 이해 불가한 에너지에 의해 가능하고 이는 충직한 헌애자들을 보호하시고 믿음이 없는 악마들을 섬멸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 주님, 오 모든 곳에 두루 계신 최고인격신이시여, 오 초영혼, 모든 신비적 힘의 통제자이시여, 이 삼계 안에서 당신의 초월적 유희를 전시된 그대로 이해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당신이 어떻게 당신의 요가마야와 화신들을 확장하시고 당신이 당신의 초월적 에너지로 어떻게 행위를 하시는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 친애하는 주님, 이 전 우주의 발현은 번득이는 꿈 같고 그 일시적 존재는 마음을 어지럽히기만 합니다. 그 결과, 이 존재 속에서 우리는 불안감으로 가득합니다. 이 물질계 속에서 사는 것은 그저 고통스럽고 괴로움으로 가득함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이 일시적 물질계의 존재가 영원하고 축복과 지식으로 가득한 당신의 몸에서 나왔기에 만족스럽고 소중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므로 제 결론은 당신은 초영혼, 절대진리, 지고한 본래의 사람이며 당신의 이해 불가한 초월적 능력으로 당신이 당신 자신을 너무나 많은 비쉬누 형상으로 확장하셨어도, 그리고 생명체와 다른 에너지 속에 확장하셨어도 당신은 의심의 여지 없이 지고한 한 분이시고 지고의 초영혼이십니다. 수많은 생명체는 마치 원래 불, 당신에게서 나온 불꽃과 같습니다. 비인성적 초영혼에 관한 개념은 잘못된 것인데 그 이유는 저는 당신을 원래의 사람으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부족한 사람들은 당신이 마하라자 난다의 아들이어서 당신이 원래의 사람이 아니라 그저 우리와 같은 인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오해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실제로 원초적 사람이고 이에 어떤 의심도 없습니다. 당신은 절대 진리이고 당신은 이 물질적 암흑이 아닙니다. 당신은 원래의 브라흐마죠띠와 태양, 달, 별 같은 발광체의 기원입니다. 당신의 초월적 발산은 브라흐마죠띠와 동일합니다. 브라흐마 삼히따에서 묘사하듯 브라흐마죠띠는 끄리쉬나의 몸에서 바란하는 광채입니다. 아주 많은 비쉬누 화신과 당신의 다른 자질의 화신이 있지만 그 모든 화신은 다 같지 않습니다. 당신이 원래 램프입니다. 다른 화신들은 원래 램프와 같은 광도를 지니지만 원래 램프가 모든 빛의 시작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이 물질계의 창조물이 아니기에 이 세계가 파괴된 후에도 당신은 당신으로 계속해서 존재하실 겁니다.

“당신은 원래의 사람이어서 고빨라 따빠니 우빠니샤드와 브라흐마 삼히따에 고빈담 아디 뿌루샴(govindam ādi-puruṣam)로 묘사됩니다. 고빈다는 원래의 사람이고 모든 원인의 원인입니다. 바가바드 기따에서도 말하기를 당신은 브라흐만 광채의 원천이라고 합니다. 누구도 당신의 몸이 보통 물질적 몸이라고 결론 내려서는 안 됩니다. 당신의 몸은 악샤라(akṣara), 즉 파괴될 수 없습니다. 물질적 몸은 항상 세겹의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당신의 몸은 삿 칫 아난다 비그라하, 완전한 행복과 지식, 그리고 영원성입니다. 어머니 야쇼다의 어린 아들로서의 당신의 유희나 고삐들의 연인으로서의 유희는 물질적 자질로 절대 오염되지 않았기에 당신은 니란자나(nirañjana)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신이 여러 소치기 소년들과 송아지들로 당신을 보이셨어도 당신의 초월적 능력은 줄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항상 완전한 지고의 절대 진리이고 완전한 지고의 절대 진리로 남습니다. 완전함에서 많은 확장이 나왔지만 완전함은 그대로입니다. 당신의 모든 유희가 영적이므로 물질적 본성에 의해 더렵혀질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아버지와 어머니 난다와 야쇼다의 자식 역할을 하셨어도 당신의 능력은 감소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당신의 헌애자를 향한 당신의 커다란 사랑의 한 표현입니다. 당신과 맞서는 다른 정체성은 없습니다. 지식이 부족한 자들은 당신의 현현과 유희가 그저 물질적 지정이라고 결론짓습니다. 고빨라 따빠니 우빠니샤드에서 확증했듯이 당신은 무지와 지식 둘 다를 초월하십니다. 당신은 원래의 암리따, 파괴될 수 없는 불멸의 넥타르입니다. 베다에서 확증되었듯, 암리땀 샤스바땀 브라흐마(amṛtaṁ śāśvataṁ brahma)입니다. 브라흐만은 영원하고 모든 것의 지고한 기원이며 출생과 죽음이 없습니다.      

“우빠니샤드에서 지고의 브라흐만은 태양처럼 빛나고 모든 것의 기원이며 그 원래의 사람을 이해할 수 있는 누구라도 물질적 속박된 삶에서 해방된다고 말합니다. 누구라도 그저 봉헌으로 당신께 애착하면 당신의 실제 위치, 출생, 현현, 사라지심과 행위를 알 수 있습니다. 바가바드 기따에 확증되었듯이 그저 당신의 근원적 위치, 현현과 사라지심을 이해함으로써 현재의 이 몸이 끝날 때 즉시 영적 왕국으로 격상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물질적 무지의 대양을 건너려고 총명한 자는 당신의 연꽃발에 은신하여 영적 세계로 쉽게 옮겨 갑니다.      

“당신이 지고의 영혼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소위 명상가라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말하듯이, 당신은 모든 이의 가슴속에 계신 지고의 영혼입니다. 그러므로 당신이 아닌 어떤 것을 명상할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의 원래 형상 끄리쉬나를 명상하는 데 항상 몰입하는 자는 물질이라는 무지의 대양을 쉽게 건널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초영혼으로 알지 못하는 자는 소위 명상이라는 것을 해도 이 물질계 속에 남습니다. 만일 당신의 헌애자들과 교류함으로써 주 끄리쉬나가 원래의 초영혼이라는 지식을 알게 되면 물질이라는 무지의 대양을 건너는 것이 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밧줄을 뱀으로 착각하면 겁에 질리지만, 그 밧줄이 뱀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자마자 두려움에서 벗어납니다. 그러므로 당신을 바가바드 기따에 말씀된 당신의 개인적 가르침을 통해 이해하거나 당신의 순수한 헌애자들의 가르침을 통해 이해하면 스리마드 바가바땀과 다른 모든 베다 문헌에서 말하듯 당신이 궁극적 이해의 목표라는 것을 깨달으면 그는 이 물질적 존재로 더는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소위 해방과 속박은 밧줄이 뱀이 아닌 것을 알아서 더는 무서워하지 않는 것처럼 당신의 봉헌에 이미 종사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헌애자는 이 물질계가 당신께 속한다는 사실을 알기에 모든 것을 당신을 행한 초월적 사랑의 봉사에 사용합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어떤 속박도 없습니다. 태양 속에 이미 위치한 사람에게 낮이나 밤이라는 이름으로 태양이 뜨고 지는 것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끄리쉬나 당신은 태양과 같고 마야는 어둠과 같다고도 합니다. 태양이 있는 곳에 어둠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을 섬기는 데 종사함으로써 항상 당신의 존재 속에 있는 자에게 속박과 해방은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이미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연꽃 발에 은신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해방되었다고 잘못 생각하는 자는 그들의 순수하지 않은 지성 때문에 떨어집니다.            

“초영혼이 당신의 인격과 다르다고 생각하고 초영혼이나 지고의 브라흐만을 숲속이나 히말라야 동굴 속 같은 다른 곳에서 찾는 자들의 상태는 아주 한탄할 만합니다. 바가바드 기따 안에 있는 당신의 가르침은 자아 인식의 모든 다른 과정을 버리고 그저 당신께 항복하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것만이 완전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모든 점에서 최상이므로 브라흐만 광채를 좇는 자들 또한 당신을 찾아해매고 있습니다. 초영혼 깨달음을 좇는 자들도 당신을 찾고 있습니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말하듯이 당신 스스로 당신의 부분적 표상인 초영혼으로서 이 물질적 우주의 발현 안에 들어가셨습니다. 당신은 모든 이의 가슴 속에 계시기에 초영혼을 다른 곳에서 찾아 나설 필요가 없습니다. 누군가 그렇게 하면 그런 자는 그저 무지한 자입니다. 그런 위치를 초월한 자가 당신이 무한하다는 것을 이해합니다. 당신은 안과 밖에 다 계십니다. 그러므로 당신의 존재는 모든 곳에 있습니다. 초영혼을 다른 곳에서 찾는 대신 헌애자는 자기 마음을 내면에 계신 당신께 집중합니다. 실제로 물질적 개념의 삶에서 해방된 사람이 당신을 찾아 나설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밧줄을 뱀이라고 생각하는 예는 당신을 여전히 알지 못하는 자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사실 밧줄을 뱀으로 착각할 때 뱀의 존재는 오직 마음속에 있습니다. 마야의 존재도 마찬가지로 오직 마음속에 있습니다. 마야는 다른 것이 아니라 당신의 인격에 관한 무지입니다. 당신의 인격을 잊을 때 마야에 속박된 상태가 됩니다. 그러므로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당신께 고정된 자는 환영에 빠지지 않습니다.

“봉헌을 조금이라도 한 자는 당신의 영광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브라흐만 깨달음이나 빠람아뜨마 깨달음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자는 당신이 그런 자에게 약간의 봉헌의 결과를 내리시지 않는 한, 당신의 이런 특징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러 비인성주의자의 영적 스승이거나 숲이나 산의 동굴에 가서 세속을 버린 자로서 수년을 명상해도 약간의 봉헌으로 당신의 호의를 받지 않고서는 당신의 영광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브라흐만 깨달음 혹은 빠람아뜨마 깨달음은 봉헌의 경이로운 결과에 닿지 않는 한 수년간 추구해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친애하는 주님, 제가 현생 혹은 내생에 어디에서 출생을 맞든 너무나 운이 좋아 당신의 헌애자 중 하나로 여겨지길 기도합니다. 제가 어디에 있든 당신을 향한 봉헌에 종사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장래에 제가 어떤 형태의 삶을 갖게 될지 저는 신경조차 쓰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헌애자들은 너무나 운이 좋아 심지어 소와 송아지 형태로, 당신을 향한 초월적 사랑의 봉사와 교류에 항상 종사하는 것을 제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무지에 가득한 현재의 이런 높은 위치 대신 그들 중 하나가 되길 저는 소망합니다. 브린다반의 고삐들과 소들은 너무나 운이 좋아 당신께 젖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장대한 제사를 거행하고 제사에 귀중한 여러 염소를 바치는 사람들은 당신을 이해하는 완성을 달성할 수 없지만 그저 봉헌으로 이 순진한 마을 여성들과 소들은 모두 그들의 모유와 우유로 당신을 기쁘게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만족할 때까지 그들의 젖을 먹었지만 제사를 거행하는 자들에 의해 절대 그만큼 만족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저는  최고인격신, 절대 진리 당신께서 그들의 가장 가까운 사랑의 대상으로서 여기 계시기에 마하라자 난다와 어머니 야쇼다, 그리고 소치기 소년들과 고삐들의 운 좋은 위치에 그저 놀랄 뿐입니다. 친애하는 주여, 브린다반의 이 주민들의 행운을 사실 누구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생명체의 다양한 감각을 통제하는 하위신이고 그런 특권을 즐기는 데 자부심을 느끼지만 사실 우리의 위치와 브린다반의 이 운 좋은 위치는 비교할 수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실제로 그들의 감각 행위로 당신의 존재를 만끽하고 당신의 교류를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각의 통제자라는 것에 자만하지만 여기 브린다반의 주민들은 너무나 초월적이어서 우리의 통제를 받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들은 당신을 향한 봉사를 통해 그들의 감각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생에 한 번이라도 이 브린다반 땅에 태어나는 기회를 얻는다면 저는 행운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친애하는 주님, 그러므로 저는 물질적 풍요나 해방에 관심이 없습니다. 당신의 연꽃 발에 저는 가장 겸허하게 기도하오니, 제발 제가 이 브린다반 숲속에 어떤 출생이라도 맞을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러면 제가 브린다반의 헌애자들의 발에 묻은 먼지의 호의라도 받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이 땅의 겸허한 지푸라기로 자랄 기회가 주어진다면 자에게는 영광스러운 출생일 것입니다. 그러나 브린다반의 숲속에서 태어날 만큼 운이 좋지 않다면 브린다반의 외곽 바로 인접한 곳에서 태어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세요. 그러면 헌애자들이 저를 밟고 지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 또한 저에게는 큰 행운입니다. 여기 모든 이가 완전히 끄리쉬나 의식이기만 하기에 저는 헌애자의 발에 묻은 먼지에 덮일 출생을 갈망할 뿐입니다. 여기 있는 이들은 베다 자체가 찾고 있는 끄리쉬나 혹은 무꾼다(Mukunda)의 연꽃 발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확증하기를, 베다 지식의 목적은 끄리쉬나를 찾는 것이다. 그리고 브라흐마 삼히따에서 말하기를, 베다 문헌을 체계적으로 읽음으로써 최고인격신 끄리쉬나를 찾기란 몹시 어렵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의 순수한 헌애자의 자비를 통해 아주 쉽게 얻을 수 있다. 브린다반의 순수한 헌애자들은 무꾼다(주 끄리쉬나)를 항상 볼 수 있어서 아주 운이 좋다. 무꾼다라는 이 단어는 두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주 끄리쉬나는 해방을 수여할 수 있으시기에 초월적 행복이다. 무꾼다는 꾼다 꽃 같은 당신의 웃는 얼굴을 뜻하기도 한다. 무카는 얼굴을 의미한다. 꾼다 꽃은 아주 아름답고 웃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그런 비교를 하는 것이다.

브린다반의 순수한 헌애자들과 다른 곳의 헌애자들의 차이점은 브린다반의 주민들은 끄리쉬나와 교류하는 것 말고는 다른 욕망이 없다는 점이다. 끄리쉬나는 당신의 헌애자들에게 아주 친절하셔서 그들의 욕망을 들어주신다. 그들이 끄리쉬나와의 교류를 항상 원하기에 주께서 항상 그것을 주시려고 한다. 브린다반의 헌애자들은 자연스러운 연인이기도 하다. 그들은 이미 끄리쉬나를 향한 초월적 사랑을 자연히 발전시켰기에 규정 원칙을 엄격히 따를 필요가 없다. 규정 원칙은 그러한 자연스러운 사랑을 발전시키지 않은 사람들에게 필요하다. 브라흐마도 주의 헌애자이지만 그는 규정 원칙을 따라야 하는 평범한 헌애자이다. 그는 브린다반에서 태어나면 자연스러운 사랑의 단계에 오를 수도 있기에 거기에서 태어날 기회를 달라고 끄리쉬나께 기도한다.

브라흐마가 계속 말했다. “주님, 가끔 저는 어떻게 당신께서 감사하며 이 브린다반 주빈들의 봉헌에 보답할 수 있는지 어리둥절합니다. 당신이 모든 축복의 지고한 근원임을 저는 알지만 당신이 이 브린다반 주민들에게서 받은 모든 봉사에 어떻게 보답하실 수 있는지 어리둥절합니다. 당신은 너무나 친절하고 너무나 관대하셔서 아주 애정이 어린 어머니로 가장함으로써 당신을 속이려고 온 뿌따나에게마저 해방을 선사하시고 실제 어머니의 위치를 수여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가족, 아가수라와 바까수라 같은 다른 악마들도 해방되어 당신을 얻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에 저는 어리둥절합니다. 브린다반의 이 주민들은 당신께 그들의 몸, 마음, 사랑, 집, 소유물 모든 것을 드렸습니다.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활용했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그들에게 빚을 갚으실 수 있을까요? 당신은 이미 뿌따나에게 당신을 주셨습니다. 당신은 브린다반 주민들이 바친 사랑의 봉사를 갚을 수 없으셔서 영영 채무자로 남으시리라 추측됩니다.

“주님, 전 브린다반 주민들이 바친 너무나도 훌륭한 봉헌의 자질이 그들의 본능을 모두 자연스럽게 당신을 향한 사랑의 봉사에 썼기에 가능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물질적 대상과 집에의 집착은 환영 때문이고 그것이 생명체를 물질계 속에 속박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끄리쉬나 의식이 아닌 사람들의 경우에만 해당합니다. 브린다반의 주민들의 경우에는 그런 가정에 대한 집착이라는 방해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집착은 당신을 향하고 있고 그들의 집은 그곳에 당신이 계속해서 계심으로써 사원으로 바뀌었기에, 그리고 그들은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잊어버렸기에 장애란 없습니다. 끄리쉬나 의식의 사람에게 가정에의 집착이란 방해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환영 또한 없습니다.

“당신이 소치기 남성의 자식으로, 어린 소치기 소년으로서 현현하심은 물질적 행위가 전혀 아니라는 것 또한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들의 애정에 너무나 감사해 당신의 초월적 계심으로 그들이 더 많은 사랑의 봉사를 하도록 고무하시려고 여기에 계십니다. 브린다반에서는 모든 것이 당신을 향한 사랑의 봉사에 바쳐지기에 물질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구분이 없습니다. 친애하는 주님, 당신의 브린다반 유희는 당신의 헌애자들을 고무하시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누군가가 당신의 브린다반 유희를 물질적이라고 간주한다면 그는 오도될 것입니다.

“친애하는 주 끄리쉬나, 당신이 보통 사람처럼 물질적 몸을 가진다고 주장하며 당신을 비웃는 자들은 바가바드 기따에서 악마적이고 지성이 부족한 자라고 묘사되었습니다. 당신은 항상 초월적이십니다. 비헌애자들은 당신을 물질적 창조물이라고 여기기에 속습니다. 실제로 당신은 당신의 헌애자들의 헌애와 초월적 행복을 늘리시고자 평범한 소치기 소년과 똑같은 이 몸을 띠실 뿐입니다.

“친애하는 주님, 절대신을 이미 깨달았거나 자기 자신이 신이 되었다는 깨달음을 광고하는 자들에 관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에 관한 한, 솔직히 고백하건대, 제 몸과 마음, 말로 당신을 깨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제가 당신에 관해 무엇을 말할 수 있고, 제 감각으로 당신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감각의 주인인 제 마음으로 당신을 완벽하게 생각할 수조차 없습니다. 당신의 자질과 행위, 그리고 당신의 몸은 이 물질계 속의 어떤 인간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직 당신의 자비로 인간은 당신이 누구인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주님, 가끔 제가 이 우주의 주인이라고 잘못 생각하지만 당신이 모든 창조의 지고한 주이십니다. 저는 이 우주의 주인일지 모르나 수많은 우주가 있고 그런 우주에 주재하는 수많은 브라흐마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당신이 그들 모두의 주인이십니다. 모든 이의 가슴 속에 계신 초영혼으로서 당신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러니 제발 저를 항복한 당신의 종으로 받아들여 주세요. 제가 당신의 친구들과 송아지와 함께하는 당신의 유희를 방해하는 커다란 잘못을 저지른 점에 대해 용서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당신이 친절을 베푸시어 허락하신다면 저는 즉시 떠날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당신의 친구들과 송아지들과 함께 저 없이 즐기실 수 있습니다.

“친애하는 주 끄리쉬나시여, 당신의 이름 자체가 당신은 전적으로 매력적인 분이라는 것을 암시합니다. 태양과 달의 매력은 모두 당신 덕분입니다. 태양의 매력으로 당신은 야두 왕조의 존재 자체를 더욱 아름답게 하고 계십니다. 달의 매력으로 당신은 땅, 하위신, 브라흐만, 소, 대양의 능력을 강화하고 계십니다. 당신은 지고의 매력이므로 깜사같은 악마와 다른 자들이 섬멸됩니다. 그러므로 당신만이 창조 안에서 숭배받아 마땅한 신이시라는 결론을 저는 내릴 수 있습니다. 이 물질계가 소멸할 때까지 제 경배를 받아주십시오. 이 물질계에 햇볕이 있는 한, 친절을 베푸시어 제 경배를 받아주세요.”

이렇게 이 우주의 주인, 브라흐마가 겸허하고 존경에 가득 찬 절과 기도를 최고인격신께 바친 후 당신 주변을 세 번 돌았고 브라흐마로까로 알려진 자기 보금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최고인격신의 손짓으로 그는 돌아갈 허락을 받았다.

브라흐마가 떠나자마자 스리 끄리쉬나는 즉시 야무나강둑으로 돌아가 당신의 송아지들과 소치기 소년 친구들이 사라진 바로 그날 그대로의 상태로 재회했다. 끄리쉬나는 당신의 친구들이 야무나강둑에서 점심을 먹고 있는 동안 떠났고, 당신이 정확히 일 년 후 돌아왔어도 소치기 소년들은 끄리쉬나가 몇 초 만에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끄리쉬나의 다른 에너지들이 작용하는 방식이다. 바가바드 기따에서 말하기를, 끄리쉬나는 모든 이의 가슴속에 자리하고 계시고 당신은 기억과 망각 둘 다 초래하신다고 한다. 모든 생명체는 주의 지고한 에너지에 의해 통제되고 있고, 그들의 근원적 위치를 가끔은 기억하기도, 가끔은 잊기도 한다. 당신의 친구들도 그런 식으로 통제되어 자기들이 일 년 내내 야무나강둑에 없었고 브라흐마의 환영 주문에 통제받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끄리쉬나가 소년들 앞에 나타났을 때 그들은 “끄리쉬나가 1분만에 돌아왔다.”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끄리쉬나가 점심 먹는 데 빠지고 싶어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웃기 시작했다. 그들은 아주 기쁨에 넘쳐 끄리쉬나를 초대했다. “우리의 소중한 친구, 끄리쉬나, 너는 아주 빨리 돌아왔구나! 좋아. 우린 아직 점심을 시작하지 않았어. 한 움큼도 먹지 않았어. 그러니 얼른 와서 우리랑 같이 점심을 먹자.” 끄리쉬나가 웃으며 그들의 초대를 수락했고 당신의 친구들 속에서 점심을 즐겁게 먹기 시작했다. 먹으면서 끄리쉬나는 생각했다. “이 소년들은 내가 몇 초 만에 돌아왔다고 생각하지만 작년에 내가 브라흐마의 신비한 행위에 관여했다는 것을 알지 못해.”

점심을 다 먹은 후 끄리쉬나와 당신의 친구들과 송아지들은 브라자부미에 있는 자기들의 집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가면서 그들은 거대한 뱀의 모습을 한 아가수라의 죽은 몸통을 즐겁게 쳐다보았다. 끄리쉬나가 브라자부미의 집에 돌아왔을 때 브린다반 주민 모두 당신을 보았다. 끄리쉬나는 숲속 꽃들로도 장식된 당신의 투구에 공작 깃털을 꽂고 있었다. 끄리쉬나는 꽃화환도 걸고 있었고 고바르단 언덕 동굴에서 수집한 다양한 색상의 미네랄로 발려 있었다. 고바르단 언덕은 천연 철단을 공급하는 것으로 항상 유명했고 끄리쉬나와 당신의 친구들은 그들의 몸에 그것을 발랐다. 그들 각각은 버팔로 뿔로 만든 나팔과 막대기, 피리를 가지고 있었고 각각 자기들의 송아지를 특정한 이름으로 불렀다. 소치기 소년들은 끄리쉬나의 경이로운 활약이 너무나 자랑스러워 마을에 들어가는 동안 당신의 영광을 항상 노래했다. 브린다반의 모든 고삐는 아름다운 끄리쉬나가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봤다. 소년들은 거대한 뱀에게 삼켜졌을 때 어떻게 구제되었는지, 그 뱀이 어떻게 죽었는지를 묘사하는 멋진 노래를 작곡했다. 어떤 소년들은 끄리쉬나는 야쇼다의 아들로 묘사했고 어떤 소년들은 난다 마하라자의 아들로 묘사했다. “그는 너무나 경이로워 우리를 거대한 뱀의 손아귀에서 구했고 뱀을 죽였어,” 소년들이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아가수라를 죽인 지 일 년이 지났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것과 관련해 마하라자 빠릭싯이 슈까데바 고스와미에게 브린다반 주민들이끄리쉬나가 자기들의 가족 구성원도 아닌데 어떻게 갑자기 끄리쉬나를 향한 그렇게 큰 사랑을 발전시킬 수 있었는지 물었다. 마하라자 빠릭싯이 물었다. “원래 소치기 소년들이 없어진 동안, 끄리쉬나께서 당신을 확장하셨을 때, 왜 소년들의 부모들은 자기 아들들보다 끄리쉬나를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또한 소들은 자기들 송아지보다 그 송아지들을 더 많이 사랑하게 되었습니까?”

슈까데바는 마하라자 빠릭싯에게 모든 생명체는 사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애착한다고 말했다. 집, 가족, 친구, 국가, 사회, 부, 풍요, 명성 같은 외적 소유물은 모두 생명체를 만족시키는 데 부수적인 것일 뿐이라고 했다. 그런 것들이 자기에게 만족을 가져다주기 때문에 만족스러울 뿐이다. 그런 이유에서 생명체는 자기중심적이고 아내나 자식, 친구 같은 가까운 사람보다 자기 몸과 자기 자체에 더 애착한다. 자기 자신이 즉시 위험에 빠지게 되면 먼저 자기 자신을 보살핀 후 다른 사람을 보살핀다. 그것이 자연스럽다. 그 말은 생명체는 어떤 것보다 자기 자신을 더 많이 사랑한다는 뜻이다. 자기 다음으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애정의 대상은 자기의 육신이다. 영혼에 관한 정보가 없는 사람은 자기의 물질적 몸에 너무나 집착하고 나이가 들어서까지 자기의 늙고 부서진 몸을 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여러 인위적인 방식으로 몸을 보존하려고 한다. 모두 육체적 혹은 정신적 개념의 삶 속에서 자기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려고 밤낮으로 열심히 일한다. 우리는 물질적 소유에 집착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감각이나 몸에 즐거움을 주기 때문이다. 몸에 대한 집착은 오직 “나”, 영혼이 그 몸 안에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깨달음에 더 나아가면 영혼이 즐거운데 그 이유는 영혼은 끄리쉬나의 부분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끄리쉬나가 즐겁고 전적으로 매력적인 분이다. 당신이 모든 것의 초영혼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정보를 주시고자 끄리쉬나께서 강림하셔서 당신이 매력적인 모든 것의 중심이라고 말씀하신다. 끄리쉬나의 확장 없이 아무것도 매력적이지 않다.

우주적 발현 안에서 매력적인 어떤 것도 끄리쉬나 때문이다. 그러므로 끄리쉬나가 모든 즐거움의 저장소이다. 모든 것의 유효 원칙은 끄리쉬나이고 아주 높은 초월주의자들은 모든 것을 끄리쉬나와의 관계 속에서 본다. 차이따냐 차리땀리따에서 말하기를, 마하 바가바따, 즉 아주 진보한 헌애자는 모든 움직이고 움직이지 않는 생명체 안에서 끄리쉬나를 유효 원칙으로 본다. 그러므로 그는 이 우주적 발현 속에서 모든 것을 끄리쉬나와 관련지어 본다. 끄리쉬나가 모든 것이라고 은신한 운 좋은 자들에게 해방은 이미 달성되었다. 그는 더는 물질계 속에 있지 않다. 이것은 바가바드 기따에서 확증한다. 끄리쉬나의 봉헌에 종사하는 누구라도 이미 브라흐마 부따, 즉 영적 단계에 있는 것이다. 끄리쉬나라는 이름 자체가 경건함과 해방을 암시한다. 끄리쉬나의 연꽃 발에 은신한 누구라도 무지의 대양을 건너는 배에 올라탈 수 있다. 그에게 이 거대하고 광활한 물질적 발현의 공간은 송아지 발굽자국에 고인 물처럼 미미하다. 끄리쉬나는 모든 위대한 영혼의 은신처이고 물질계들의 은신처이기도 하다. 끄리쉬나 의식의 단계에 있는 자는 바이꾼타, 즉 영계에 멀리 있지 않다. 그는 내딛는 발자국마다 위험이 도사리는 물질계 내에 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브라흐마의 말과 기도문을 읊으며 슈까데바 고스와미는 마하라자 빠릭싯에게 끄리쉬나 의식을 완전히 설명했다. 야무나강둑에서 소년들과 함께한 주 끄리쉬나의 유희, 그들과 점심 먹는 행위, 브라흐마가 끄리쉬나께 바친 기도문은 모두 초월적 주제이다. 누구라도 이것을 듣거나, 낭독하거나, 구송하면 그 사람의 영적 바람은 분명 성취된다. 이로써 끄리쉬나의 어린 시절 유희, 브린다반에서 발라라마와 소치기 소년들과 함께한 오락이 설명되었다.

이로써 끄리쉬나 제14장  브라흐마가 주 끄리쉬나께 바친 기도문의 박띠베단따 주석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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