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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절

아타이따다삐 아샥또’시 athaitad apy aśakto ’si
까르뚬 맏-요감 아스리따하 kartuṁ mad-yogam āśritaḥ
사르바-까르마-팔라-띠아감 sarva-karma-phala-tyāgaṁ
따따 꾸루 야따뜨마반 tataḥ kuru yatātmavān

아타: 비록, 에땃: 이것, 아삐: 또한, 아샥따하: 할 수 없는, 아시: 네가, 까르뚬: 수행하다, 맛: 나에게, 요감: 봉헌에, 아스리따하: 은신하는, 사르바-까르마: 모든 행위의, 팔라: 결과들의, 띠아감: 버림, 따따하: 그러면, 꾸루: 하다, 야따-아뜨마-반: 자아에 위치한.

그러나 네가 만약 이러한 의식으로 나를 위해 일할 수 없다면, 네가 한 일의 모든 결과를 포기하고 자기 통제를 하여라.

사회적, 가족적, 종교적 이유로 또는 다른 장애 요인 때문에 끄리쉬나 의식의 활동에 동조하지 못할 수도 있다. 끄리쉬나 의식 활동에 직접 참여하면 가족이 반대할 수도 있고, 다른 여러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 그러한 어려움에 닥친 자에게는 자기가 쌓은 행위의 결과를 어떤 대의에 희생할 것이 권고된다. 이러한 과정은 베다의 법규에 설명되어 있다. 여러 희생제의와 보름달이 뜬 날에 하는 특별한 의식, 선업을 짓는 특별한 일 등에 관한 많은 설명이 나와 있다. 그렇게 인간은 지식의 단계에 점진적으로 오를 수 있다. 끄리쉬나 의식의 활동에 전혀 관심이 없는 자들조차 병원이나 사회 기관에 자선함으로써 자기가 힘들게 일해 번 결과를 포기한다. 이것도 역시 베다에서 권장하는데, 그 이유는 자기가 한 일의 결과를 버리는 실천을 함으로써 반드시 마음이 점차 정화되며, 그 정화된 마음의 상태에서 끄리쉬나 의식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끄리쉬나 의식 그 자체가 우리 마음을 정화하기 때문에 끄리쉬나 의식은 다른 어떤 경험에 의존하지 않지만, 끄리쉬나 의식을 받아들이는 데 장애가 있으면 자기 행위의 결과를 포기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사회봉사, 공동체 봉사, 국가에 봉사, 자기 국가를 위한 희생 등을 실천할 수 있고 그렇게 함으로써 언젠가 지고한 주를 향한 순수한 봉헌에 이르는 길로 들어설 수 있다. 우리는 바가바드 기따(18.46)에서 “야따 쁘라브릿띠르 부따남(yataḥ pravṛttir bhūtānām)”을 찾아볼 수 있는데, 더 높은 대의를 위해 희생하고자 결심하면 그 드높은 대의가 끄리쉬나라는 것을 모르더라도, 바로 그 희생정신 때문에 끄리쉬나가 지고의 명분이라는 사실을 점차 이해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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